▶ 혼전속 미국 대통령 선거
▶ 정리-권정희 편집위원
미국 대통령선거가 끝난지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 대통령 당선자가 없다. 재투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는 가하면, 유권자 표를 더 많이 받고도 후보가 떨어지는 현 선거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혼전을 거듭하며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번 선거의 내막과 앞으로의 전망을 본보 논설·편집위원들이 진단해본다.
▲옥세철 논설위원 - 미국 대선 사상 초유의,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플로리다주 재개표 사태입니다. 거기다가 플로리다주 팜비치 카운티 주민들이 이상하게 인쇄된 투표용지에 시비를 걸어 재투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로인해 전 미국의 이목이 플로리다에 쏠려 있습니다.
▲민경훈 편집위원 - 이번 만큼 극적인 선거는 살아 생전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대통령 당락을 좌우할 플로리다주의 승자가 두 번이나 바뀌는가 하면 재검표 결과 표차가 불과 수백표 차이로 줄었습니다. 총유효표를 더 많이 획득한 후보가 선거인단수에서는 지는가 하면 상원선거에서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한테 이기는 이변이 속출했습니다.
▲권정희 편집위원 - 요즘처럼 사람들이 TV앞에 딱 달라붙어 있는 적도 드물겁니다. 스릴과 서스펜스, 클리프 행어가 미국 언론에서 이번 선거를 표현하는 단골 용어들입니다. 할리웃에서 이런 식으로 선거 영화를 만들었다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모두 웃었을 거란 논평도 있습니다. 플로리다 재검표에서 후보들이 얻은 표수가 처음 개표때와 달라지는 걸 보면서 고의적은 아니더라도 계수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확산되는 것 같아요.
▲옥 -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분노감까지 퍼지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헌정위기론까지 제기되는 실정입니다. 또 TV매체에 대한 불신감도 증폭되고 있습니다.
▲박덕만 편집위원 - 이번 선거로 인해 미국정치가 추한 꼴을 보이게 됐습니다. 투표 전 캠페인 기간에는 민주당의 고어후보가 공화당의 부시후보보다 전체 표는 적게 받고서 선거인단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때 선거인단 제도의 맹점이 거론되자 민주당진영에서는 법은 법이니만큼 지켜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막상 선거결과가 반대로 나오자 민주당진영 일각에서 선거인단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며 부시가 당선돼도 정통성을 인정 받기 어려울 것이란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규칙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말이 없다가 불리하게 작용하자 불편해하는 꼴입니다.
▲옥 - 이번 대선서 중요한 것은 누가 이겼는가 하는 것보다도 재개표결과 당선이 확정된 대통령을 미국이 어떻게 받아드릴까 하는 문제 같습니다. 정통성 시비 때문입니다. 부시가 되든, 고어가 되든 43대 미대통령은 재개표시비 때문에 정통성문제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그런 대통령이 투표결과 그렇지않아도 더 양분된 의회에 대해 과연 정치력을 발휘할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권 -이번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다음 대통령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리더십입니다. 국민과의 관계로 보나, 의회와의 관계로 보나 ‘적과의 동침’이 될테니까요. 대통령이 양분된 여론과 양당간 대치정국에 발목이 잡히면 4년동안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하고 아무 일도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옥 - 그 보다도 우선 큰 문제는 미국민이 납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인데 소수의 지지를 받은 후보가 대통령이 됐을 때 이를 미국민이 어떻게 받아드릴것인지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재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실시된 NBC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55%의 미국민은 국민투표 지지율이 높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권 - 문제의 발단은 선거인단제이지요. 국민의 표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지 어떻게 표를 적게 받고도 대표가 될 수 있는가라는 불만이 이번에 많이 불거졌어요. 하지만 선거인단 시스템은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목표로 만들어진것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똑같이 한표를 행사하다보면 우민정치가 될 위험이 있으니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예방장치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요.
▲박 - 선거에 이기고도 선거인단수가 적어서 진다는 정치현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국에서도 미국의 선거제도는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평가가 나오지요. 프랑스의 한 방송은 이번 혼란스런 대통령 선거결과는 "자신이 원하는 대통령을 뽑을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개선해 놓지 않은 미국국민들의 책임"이라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민 -부시가 총유효표에서 지고 선거인단수에서 이겨 당선될 경우 부시 집권 정통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며 선거인단제도 직선제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은 두 후보가 선거인단표를 더 얻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전제하에 캠페인을 펼쳤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한표라도 더 많으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현 제도하에서는 자기가 유리한 주에서는 선거운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효표를 많이 얻는게 목적이라면 부시는 텍사스에서, 고어는 뉴욕이나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애초에 제도를 그렇게 정해놓고 이제 와서 시비를 건다는건 비신사적 태도란 얘깁니다.
▲옥 - 대통령 선거결과 미국의 정치가 불안상황을 맞은 최근의 예는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대결 때입니다. 당시 닉슨은 국민투표에서 0.2%차이로 뒤져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러자 시카고등 일부지역에서 선거부정 문제가 불거져나왔고 실제로 그같은 의혹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습니다. 닉슨은 법정으로 갈 것이냐, 투표결과에 승복할 것이냐 양자 택일에서 승복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렸어요. 법정으로 갈 때 미헌정이 마비될 수도 있고,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해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했습니다. 이같은 결단이 훗날 1968년 대선에서 닉슨이 재기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됐지요.
▲권 - 시카고 부정선거 의혹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지금 고어 캠페인 매니저인 윌리엄 데일리의 아버지로 당시 시카고 시장이었지요. 리처드 데일리 당시 시장과 부통령 후보이던 린든 존슨 당시 상원의원이 케네디 당선을 위해 표를 조작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들이 있었지요.
▲박 - 이번에도 플로리다 일부지역에서는 부정선거 시비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흑인밀집지역인 주북부에서 하이웨이 패트롤이 도로를 차단해 투표를 방해했고 역시 민주당 표밭인 팜비치에서는 고어의 표를 뷰캐넌에게 찍게 착각할 수 있도록 투표용지를 만들었다는 등의 주장입니다. 마이애미에서는 사망자가 투표를 한 케이스도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선거에서도 부정선거 시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즘처럼 전산화가 되기 이전에는 각당의 지도자들이 사망자나 수감자등의 표를 모아 몰표를 집어넣은 예도 있었고 한사람이 여러 투표소를 돌아 다니면서 투표를 한 일도 있었습니다.
▲옥 - 60년 선거후 케네디는 자신의 승리가 살얼음같은 승리라는 점을 십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국방장관, 재무장관등 주요 각료직에 공화당 인사를 기용했지요. 재개표 결과 승리가 확정될 때 조지 W 부시는 과거 케네디처럼 초당적 조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본인도 선거공약시 초당적 협조를 강조했으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박 - 이번 선거에서 고어가 패배한다면 거기에는 네이더가 기여한바가 물론 크겠지요. 플로리다에서 고어가 불과 1000여표의 차이로 패배함으로써 대통령직을 놓치게 될 것으로 보이자 녹색당 랠프 네이더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한 정치학자는 네이더를 "나르시즘에 빠진 파괴주의자"로 몰아 붙이더군요.
▲권 - 92년 선거에서 로스 페로가 보수진영 표를 갈라놓은 것과 같은 현상이 이번에는 진보진영에서 일어났습니다. 네이더 진영과 민주당 진보파는 같은 뿌리인데 이번에 원수가 됐어요.
▲박 - 로스 페로가 19%의 표를 뺏어감으로써 당시 조지 부시대통령이 민주당의 신예 빌 클린턴에게 패배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아들 부시가 보기좋게 아버지의 복수를 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권 - 되돌아 보면 고어는 이번에 참 어려운 싸움을 했어요. 밖에서는 네이더가 표를 갉아먹고 안에서는 클린턴이 표를 깍아내고… 클린턴은 지금쯤이면 국민들이 섹스스캔들을 다 잊었으려니 했겠지만 국민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고어도 클린턴과 멀리 하면 스캔들 흙탕물이 튀지 않으려니 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투표 끝나고 나온 조사를 보면 부시 찍은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부시를 지지했다기 보다는 클린턴이 싫어서 표를 주었다고 합니다.
▲민 - 플로리다에서 고어가 근소한 차이로 질경우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유효표에서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낙선과 함께 끝날 것 같던 고어의 정치 생명은 길어지게 됐습니다. 과거 유효표에서 이기고도 낙선한 후보중에 다시 출마, 설욕을 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1824년 애담스에게 표로 이기고도 선거에서 진 잭슨이나 1888년 마찬가지로 해리슨에게 진 클리블랜드 모두 4년후 재도전해 승리했습니다.
▲옥 - 어쨌든 고어로서는 곧 고통스런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두고 보아야겠지만 재개표 결과 불과 수백표 차이로 플로리다에서 질때 법정 소송도 불사할지, 아니면 훗날을 내다보고 깨끗이 승복할지를 놓고 정치적 계산을 해야 될겁니다. 투표전의 전망은 고어가 대선서 패배할 경우 또 다시 대권주자가 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개표결과 국민투표에서 고어가 부시를 앞선 것으로 밝혀져 2004년 다시 한번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패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 - 재검표에서 부시가 이기더라도 표차가 워낙 근소하기 때문에 선거인단중에 반란표가 나올 경우 선거인단 선거에서 결과가 뒤집어질수도 있습니다. 선거인단은 자기가 지지하기로 약속한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관례지만 본인이 마음을 바꿀 경우 이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50개주중 26개주는 아무런 법적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며 처벌규정이 있는 주도 표 던진 것 자체를 무효화할 수는 없습니다. 88년 두카키스를 지지하기로 했던 후보가 벤슨한테 표를 던졌고 76년에는 포드 지지자가 레이건에게 투표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고어의 유효표가 많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더더구나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습니다.
▲권 - 민주당 표가 네이더에게로 갈라지고, 투표용지 탓에 뷰캐넌에게로 잘못 갔다고 불만이 많은 플로리다 같은데서는 혹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요. 민심이 고어 동정쪽으로 기울고 있으니까요.
▲박 - 출구조사 결과를 통해 이번 선거결과를 분석하면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더군요. 고어와 부시의 성별지지율이 남자의 경우 43%대 54%로 부시가 높고 여자의 경우 55%대 43%로 높은 것은 예상대로 였습니다만 여성표를 다시 분석해본 결과 기혼여성은 49%대 49%로 대등한 비율을 보였고 독신여성에서 66%대 30%로 고어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기혼여성의 경우 아직도 표를 찍을 때 남편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권 - 그보다는 미혼 여성들이 보다 진보적이고 기혼여성들은 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는 쪽으로 해석하면 어떨까요. 이번 선거로 뚜렷해진 것중의 하나는 미국 정계의 얼굴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성 진출이 많았지요 주지사중 2명이 더 추가돼 여성 주지사가 5명이 되었고 연방상원에도 3명이 추가돼 모두 12명이 여성 상원의원입니다. 게다가 힐러리 클린턴같은 수퍼스타가 들어갔으니 상원에서 여성 목소리가 많이 커질 것입니다.
▲민 - 이번 선거후 미주리주 연방상원선거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은 민주당의 카나헨후보가 공화당의 현직 상원의원인 애시크로포트를 누른 것을 놓고도 말이 많습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는 고사가 현실로 나타난 느낌입니다. 애시크로프트가 ‘유권자의 뜻을 존중한다’며 패배를 인정했기에 망정이지 시비를 걸고 나왔으면 문제가 복잡해질뻔 했습니다. 연방헌법은 선거 당시 그 주의 주민만이 후보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죽은 사람은 주민으로 볼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당선도 무효라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이 당선됐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는 주마다 다릅니다. 선거 자체를 무효로 하는 곳도 있고 차점자를 당선자로 하는 주도 있지만 이번 처럼 후보 미망인을 당선자로 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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