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나가 어느 모임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연단 앞에 나가서 순간적으로 느낀 것은 머리들이 모두 검다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 나이든 사람 할것없이 하나같이 검은머리뿐이었다.
한국에서는 흰머리가 많으면 직장에서 설자리가 없다고 한다. 머리에 물감을 들이는 것은 젊게 보인다는 외모에 관계된 멋내기가 아니라, 직장 생명을 더 유지하느냐 하는 생존성을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IMF 이후에 직장에 불기 시작한 강제 퇴직 바람은 나이든 중년층으로 하여금 나이가 늙어보이는것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모대기업의 이사급에 있는 간부사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장이나 회장이 모두 검은 물을 들여서 머리가 새까맣습니다. 그런데 이사라는 사람이 머리를 허옇게 해가지고 결재를 받으러 가면 몸둘바를 모르게 됩니다" 흰머리가 많으면 그만큼 나이가 많아 보이기 때문에 윗사람에게 결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순한 결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 일할수 있는 수명과도 직결된다. "40대 후반이면 직장에서 퇴직당하기 시작하는 마당에 흰머리를 가지고 수명을 연장시킬 뱃심을 가질수가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 수두룩한데 누가 머리가 허연 노인같은 부하직원을 두려고 하겠습니까? 부하 직원이 나이가 많으면 부리기도 부담이 되지 않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정년퇴직에 대한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직장인들은 외모를 가꾸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국직장을 가보세요. 허연 머리가 없어요. 80노인이 된 회장도 검은 물감을 들입니다. 머리에 물감을 들이는 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지요. 허연 머리는 어디가도 인기가 없어요. 하다못해 술집을 가도 노인처럼 보이는 흰머리는 푸대접받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젊어야 합니다"
머리에 물을 들이는 것에 대해 미국에 파견나와 있는 어느 지상사의 간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에 있을때는 흰머리에 신경을 안쓰고 지냅니다. 그러나 한국 본사에 들어 갈때는 검은 물을 안들일수가 없습니다. 흰 머리칼이 주는 중압감을 떨쳐 버릴수가 없는거죠"
머리에 물을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한국 직장인들의 절박성을 상징해 주는 말이다. 그만큼 직장인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40대 직장인들은 언제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퇴직운명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사회에 보이지 않는 불안감을 팽배시키고 있었다. 직장인들의 불안감은 직장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업이나 직장으로 한눈을 팔게하고 있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불안감은 직장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업 간부나 오너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업 간부는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시한부 불안이 있고, 기업주들은 정부로부터 눈총을 받으면 회사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이 있었다. 대기업 간부인 P씨는 김대중정부가 들어선후 중간 규모 정도 기업의 대표들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식사한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 옆에 누가 앉고,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앉았고, 대통령이 이야기할 때 누구와 눈이 많이 마주쳤느냐에 따라 기업의 주식값이 오르내린다는 말이 나올 만큼 기업은 정치권에 민감합니다. 김우중씨 보세요. 대우같은 기업이 어디 대우 하나만이겠어요. 기업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다음 선거에서 정권이 바뀌면 현대가 대우처럼 될거라는 귓속말이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어요. 그러니 정몽헌씨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일겁니다"
한국사회는 총체적 불안 사회라고 과장할수 있을만큼 불안감은 거의 모든 사람들 심리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사회가 불안의 사슬로 엮어지는것에 대해 K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게임 룰이 허물어 진 것을 들수 있을겁니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경기 규칙이 공정치 않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규칙을 지키면 낙오자가 되고, 규칙을 어기면 언제 약점을 잡힐지 모르는 불안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어요. 약점을 잡히는 불안감을 느끼더라도 우선 살아 남아야 하지 않겠어요. 오늘 한국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위법에서 자유스러울수가 없고, 불안에서 해방될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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