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열렸다 하면 반드시 불어오는 게 ‘북풍’이다. 으스스하기만 하던 이 북풍이 엘니뇨탓인지 요즘에는 훈풍으로 바뀌었다" 이건 한국 이야기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열리는 해면 빠지지 않고 나도는 말이 ‘October Surprise’다. 번역하면 ‘10월 기습설’ ‘10월의 깜짝쇼’ 정도가 되겠는데 레이스 막판에 국면전환용 대사건을 터뜨려 대세를 몰아가는 작전을 의미한다. 기습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책략은 다분히 공작적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미국의 대선 레이스가 본선으로 접어드는 시기는 노동절 연휴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워싱턴 정가는 October Surprise를 점치는 온갖 시나리오로 뒤숭숭하게 마련이다. 월스트릿 저널은 이와 관련해 특집을 마련했다. 앨 고어를 돕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October Surprise를 독자들이 알아맞추는 특집이다.
가장 많이 제시된 시나리오는 이라크등 중동지역에서 모종의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이다. 지난 98년 클린턴이 탄핵위기에 몰렸을 때 ‘사막의 여우’로 명명된 작전 하에 이라크 공습명령을 내린 사실을 상기, 이같은 사태발생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카테고리별로 나누면 선택 가능성이 가장 큰 시나리오는 전쟁으로 나타났다. 이 경우 강력 후보지역은 이라크, 중국, 유고, 콜럼비아등. 정반대로 대대적인 평화공세도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로 점쳐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남북한 등이 우선 대상지역이다.
묘한 사실은 10월 들어 이 가상의 시나리오와 아주 흡사한 사태가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점이다. 무혈 민중혁명으로 유고의 밀로셰비치 체제가 붕괴됐다. 이 바람에 역시 세계적 뉴스거리인 북한의 2인자 조명록의 백악관 방문은 빛을 바랠 정도가 됐다. 잇달아 터진 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의 유혈사태. 이어 숨돌릴 틈도 없이 미해군 함정에 대한 테러리스트 공격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발표가 나왔다.
월스트릿 저널이 제시한 가상 시나리오는 그야말로 예측일 뿐이다. 그러므로 10월 들어 잇달아 터진 이 뉴스들을 ‘10월 기습설’ 플롯에 꿰맞추어 바라보는 것은 무리다. 발칸반도, 중동지역등 열강의 이해가 복잡하게 깔린 분쟁지역 사태를 공작적 차원에서 조정해 국면 돌파용으로 이용한다는 발상, 그 자체가 만화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북한 관련 사태는 그러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북한군부 최고 실세의 백악관 방문은 그 모양새와 타이밍에서 구구한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의 사태 진전도 여러 가지 억측을 낳고 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결정이 발표되더니 클린턴의 평양행도 발표됐다. 이 발표가 나오자 미국의 조야는 벌컥 뒤집혔다. 보수파는 말할 것도 없고 중도, 자유진보 세력에 이르기까지 온갖 스펙트럼에서 비난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요약하면 국무장관의 방북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대통령의 북한방문은 미국외교의 원칙면에서나 명분상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방북의 타이밍도 문제다. 선거후 클린턴은 말 그대로 ‘레임덕’이 되는데 대통령 당선자를 제치고 클린턴이 평양을 방문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 이와 함께 클린턴 방북계획은 업적 과시용의 ‘지극히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난도 따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새삼 궁금한 대목은 클린턴 행정부 외교팀은 이같은 반발을 전혀 예상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왜. 여기서 제기되는 게 ‘October Surprise 논리’다. 정치적 고려가 최우선시 되는 이 논리에 따르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북한과의 협상은 비밀외교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공작적 차원의 조정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기나긴 협상에서 북한과 마침내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마침 선거시즌. 해서 정치적 배려가 이루어졌다. 선거에도 도움이 되고 대통령의 치적도 과시할 수 있는 방향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그 과정에서 프로 외교팀의 조언 같은 것은 배제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그렇지만 정상외교, 그것도 세계 유일의 초강 미국의 정상외교가 이처럼 졸속으로 발표된 데에는 아무래도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나저나 ‘북풍’이 미국서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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