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에 올라 먼저 을밀대로 갔다. 지난번에도 와 본 곳이어서“을밀대야 잘 있느냐...”라는 옛날 노래 가사가 절로 머리에 떠올랐다. 평양에서는 보기 드물지도 모르는 민족 유적지에 서니 조국분단의 아픔이 새삼스럽게 피부에 와 닿았다.
을밀대에서 내려오는 데 청년 몇이 나무 그늘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우리 일행에 식사를 권해서 가까이 가보니 반찬이 붉은 색 일색으로 김치종류가 많은 것 같았다. 안내원의 눈치가 합석하지 말라는 듯 해서 사양했다. 계속 내려오다가 사진을 찍는 여대생 10여명을 만났다. 무릎이 덮이는 검정치마와 하얀 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사뭇 단정해 보였다. 남한의 여대생 옷차림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 개량 치마저고리는 김일성 대학교 여학생들의 교복이라고 들었다.
을밀대 아래에 있는 칠성문에서 잠깐 멈추어 사진을 찍는데 옆 마당에서 인민학교 어린이들이 둘러앉아 수건돌리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도 끼어볼까 하고 가까이 갔더니 일제히 일어나 달아나는 바람에 말도 못 붙였다.
이런 내 모습을 안내원이 뒤에서 보며 웃고 있었다. 이 안내원은 북한의 최고 학부인 김일성 대학교 역사학부에서 혁명 전통 유적지에 관해 공부했단다. 올해 44살이고 평양이 고향이라는 그는 안내원 직을 오래한 것 같았다.
호텔에 돌아오니 갑자기 졸음이 덮쳤다. 관광이 원래 신체적으로 고된 것인데 심적인 짐까지 졌으니 더 힘들 수밖에 없다. 평양에 온지 3일이 됐건만 조카가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김선생도 가족상봉에 관해 아무런 얘기도 못 들었다고 했다.
김선생 부부는 펜실베니아주에서 왔는데 떠나기 전에 유서를 써뒀다고 실토했다. 나는 모든 일이 잘되고 가족도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자주 말해주며 안심시켰다. 사실 나도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행동거지를 조심했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다보면 몸은 더욱 고달팠다.
노크 소리에 잠이 깨 문을 여니 방 청소하는 아주머니 둘이 와서 인사를 건넸다. 눈치가 돈이나 물건을 바라는 것 같아서 가져온 담배를 한 갑씩 선물로 주었다. 북한의 해외 동포원호회에서 나온‘최 참사관’이 우리 일행을 만나자고 해서 로비에 내려가 약 30분간 대화를 나눴다.
내가 아는 북한의 고위층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안내원을 통해 미리 해둔 탓인지 최참사관은 단체 면담이 끝나자 나를 따로 불렀다. 호텔 커피샵으로 자리를 옮긴 후 나는 최참사관과 안내원에게 내가 평양에 온 공식 목적을 설명했다. 첫째는 북한 유학생을 미국에 유치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미국과 남한의 사범대학 교수들로 구성될 북한교육 시찰단의 평양 방문을 섭외 하는 일이었다.
최참사관은 40 안팎인 듯 매우 젊어 보였지만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잘 정돈된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설명을 세심히 들으면서 메모를 하고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날 저녁 낭보가 잇달았다. 플로리다에서 온 이선생은 북한 내 가족 10여명이 호텔로 찾아와 만났다. 이들의 상봉엔 다른 안내원이 붙었고, 나와 김선생 부부는 우리 안내원인 이선생과 호텔 3층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박선생이라는 다른 젊은 안내원이 내게 와서 조카가 내일 저녁이나 모래 아침 신의주에서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형수님의 조카가 의주에 살고 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노심초사하고 계실 형수께 큰 선물을 드릴 수 있게 됐다. 김선생 부부도 내일이나 모래 원산으로 가서 가족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기쁜 소식으로 들뜬 마음 한 구석에 다른 이산가족들의 고통이 떠올라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10시가 훨씬 넘어 방에 들어와 한동안 잡념에 빠져 있다가 벨링햄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와 함께 기쁜 소식을 전했다. 전화료는 첫 1분에 17달러, 그 이상은 매분 당 9달러를 추가한다. 아마 그날 밤 전화료가 50달러는 나왔을 것이다. 호텔에서 팩스도 가능한데 첫 장이 19달러이고 매장마다 9달러를 추가한다고 했다. 앞으로 사용자가 많아지면 비용도 낮아질지 모르지만 지금 평양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면 참으로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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