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떠나오기 전날 인사동 골목에서 한참을 걸어 노점 주점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저녁과 술을 들은 후라 3차인 셈이었다. 다섯명의 일행이 자리 잡은 노점 술집 분위기에 나는 알지 못할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 어떤 외로움 같은 아픔을 느꼈다. 미국에 살면서 나그네 생각을 버리고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왔고 아이들에게도 그런 말을 해왔었지만, 마음 깊숙이 흐르는 나그네의 깊은 우수를 씻어 낼수가 없었다.
한참 술이 오갔을때 노점 주점을 안내했던 소설가 L씨는 "저기 큰 빌딩이 있는 자리가 어딘지 아세요? 태화관이예요. 3.1운동 선언문을 읽은 태화관이어요. 그 태화관이 없어지고 거기에 저 높은 빌딩이 서 있어요. 말이 안되는거죠. 3.1운동이 어떤 운동인데 선언문을 읽었던 역사를 헐어 버려요?" 나는 이 말에 고통을 느꼈다. L씨와 술잔을 부딫치면서 조국이 상실해 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태화관이 떠난 고층빌딩을 바라다 보았다. 조국은 무섭게 발전하고, 조국인들은 엄청난 에너지로 성취를 위해 뛰고 있었으나, 그 삶에서 자신의 역사를 잃어가고 있었다. 역사를 잃어가는 의식에 철학이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은 방문 첫날 친구 교수와 나누었던 생각으로 돌아갔다. 한국사회가 구심점을 잃어가고, 사회를 이끌어갈 좌장이 없다는 개탄이 3.1운동의 태화관을 허문것과 무관치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나 철학은 물질문명과 첨단기술에 밀려 어리론가 표류되고 있었다. 이 대세는 거역할수 없는 거대한 물길이 되어서 서울의 곳곳을 휩쓸어 가고 있었다. 자리에 합석했던 출판사 여사장이 노점 주점을 오면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세계화는 한국적인 것을 지킬 때 더욱 힘을 얻는 것이 아닌가요?" 나는 그 말에 몇 번이고 맞장구를 쳤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일수 있지요. 한국은 한국적인 것을 지켜야지요. 한국의 나쁜 것을 버리고 한국의 좋은 것을 지킬 때 한국은 세계에 우뚝설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적인 것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국적없는 유행과 문화가 선진문화의 이름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의식과 철학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밤 1시가 가까워져서 길거리 주점에서 일어섰다. 술값을 계산하는 소설가 L씨에게 젊은 주인은 "2만3천원입니다."라고 말했다. L씨는 "내가 손님 대접하는데 돈이 좀 많이 나온걸로 해야지...?"하고 농담을 했다. 젊은 주인은 큰 소리로 "7만3천원입니다"하고 외쳤다. 그 소리가 늦여름 밤하늘에 뭉클한 정이 되어 흐트러졌다. L씨는 나에게 택시를 잡아 주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 뛰었다. 그러나 택시가 서면 젊은 남녀들이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먼저 문을 잡는 사람이 우선이었다. 대부분의 택시들은 택시 싸인에 불을 끄고 빈차로 운전을 했다. 합승객을 찾거나 돈을 더 받기 위해 빈차로 손님을 찾는것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택시를 잡지 못하고 한참을 걸어 다른곳으로 옮겨갔다. L씨와 나는 팔장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미국서 이렇게 걸으면 분명이 동성애자 게이로 비쳐졌을 것이다. 택시를 못잡아 속이 상한 L씨가 이렇게 중얼 거렸다. "이럴 땐 이민 가고 싶어..."
용케 택시를 잡은후 "나는 걱정말고 우선 타라"고 말한 L씨는 운전기사 좌석으로 1만원짜리 한 장을 밀어 넣었다. "이 손님 택시비에 보태세요." L씨는 이미 저만큼 떨어져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따뜻한 마음이 가슴에 밀려 왔다. 불신과 불안이 한국을 범람했지만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 대한 정은 아직도 넘쳐 흘렀다. 그러나 인연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는 몹시도 박정한 것이 한국이었다. 서로들 술값을 내겠다고 싸우고, 서로 먼저 택시를 타라고 승강이를 벌이면서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잡은 택시도 빼앗아 탈만큼 매몰찼다.
그러나 P교수는 "정도 옛날 같지가 않다"고 말했다. "형이 미국에 사니까 사람들이 더 잘하겠지요. 여기서 경쟁자가 되면 달라져요. 경쟁에 지면 그냥 몰락입니다. 중간지대가 약해요. 대학 입시도 그렇고, 회사 입사도 그렇고 들어가는데 실패하면 설 땅이 없어요. 대학졸업자가 취직기회 한번 놓치면 평생 실업자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 편법을 해서라도 경쟁에 이기려는 것을 나무랄수가 없어요. 드라마 허준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그건 우리 사회가 아쉬워하는 동경일수가 있어요. 허준 보다는 드라마 왕건이나 용의 눈물이 더욱 한국적이지요. 무슨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잡아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지요. 한국서 미국으로 이민가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두각을 나타내지만, 미국서 한국으로 역이민 오면 미국서 태어난 아이는 경쟁을 못하고 낙오자가 되기 쉽다는 말 많이 하잖아요. 한국의 경쟁문화를 따라 올수 없는겁니다."
한국사회는 경쟁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할만큼 치열한 삶의 전쟁터였다. 이 전쟁터에서 공정하게 경쟁할수 있는 규칙이 흔들리는 것이 국민들에게 불안을 넘어서서 좌절과 절망감까지 가져다 주고 있었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면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소박한 신뢰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면 작은 삶이지만 아름답게 살수 있다는 신뢰가 없어지면서 사람들은 갈수록 돈과 권력을 동경하는 것 같았다. 돈과 권력을 욕하면서도 돈과 권력에 매달리는 아이러니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치열한 생존환경의 산물이었다.
P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어요." 대학교수라는 한 지식인이 아무런 힘을 발휘할수도 없고 자신도 그저 묵묵히 따라 갈뿐이라는 좌절은 절규처럼 들렸다. "교수요? 지금같은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직업을 보장받은 것 만으로 감지덕지 하고 있지요. 50이 넘어서 직장을 지킬수 있는곳이 몇이 안됩니다. 대학교수는 65세까지 보장되니까요." 대학교수나 지식인이 사회를 바꾸는 운동을 한다거나 역사를 변화시키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두도 못낼만큼 소시민이 되었다고 자조했다.
L씨가 밤늦게 택시를 잡으려다 내뱉은 말도 이런 좌절의 한줄기였다. "이럴땐 이민 가고 싶어!"하고 말하지만, 이 소설가는 결코 이민 갈 생각도 이민 갈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밤늦게 택시를 잡을수 없는 정글의 경쟁 앞에 소박한 삶의 즐거움이 부서지는 좌절이었다. 소박한 시민들이 소박한 삶을 살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조국이 누리고 있는 물질과 번영은 물거품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소박한 조국인들이 기다리는 것은 열심히 살면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조국은 희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민에게 희망을 줄수 있는 지도력을 조국은 찾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는데 방법이 없다고 좌절하는 시민에게 신뢰와 희망을 줄수 있는 지도력은 나타날 수 없는것일까.
오늘의 조국은 희망으로 일어선 나라였다. 가난의 질곡에서 잘 살수있다는 희망으로 일어선 조국이 잘 살게 되면서 그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잘 살수 있다는 꿈이 너무 물질적으로 치달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사는 것이 물질만이 아닌데 가난의 경험은 물질로만 치닫게 하고 의식과 철학을 내던지게 한 것 같았다. 이제 조국은 다시 한번 잘살수 있다는 희망의 멧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질적으로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살수 있는 도덕과 가치관의 재건이 시대의 숙제로 남아 있었다. 물질로만 잘살게 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불안해지고, 구심점을 잃고, 사람들은 염치와 체면을 잃어가고 나누면서 같이 사는 주춧돌이 깨어지고 있었다.
파도처럼 휘몰아 치는 변화의 격류속에서 희망을 줄 등대 불빛이 어디선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짧은 한국방문을 끝냈다. 격정과 에너지와 두뇌가 넘치는 나라, 철학과 의식이 메마른 조국이었다. 젊은이들 손에 들려진 3000원짜리 에스 프레소 커피가 내게는 너무 고급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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