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인 이민 역사 분류
미국에 한인들이 정착한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2년부터 최초의 한인 이민이 집단으로 하와이에 이주하기 시작한 1903년까지의 기간이다. 둘째는 한인들이 집단으로 하와이의 사탕 농장에 노동 이민을 시작한 1903년부터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1945년까지의 기간이다. 셋째는 1945년부터 미국의 새 이민법이 재정돼 동양인들이 대량으로 미국에 이민할 수 있게 된 1965년까지의 기간인데, 이 때에는 유학생, 전쟁 고아, 미군과 결혼한 부인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넷째는 1965년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로, 현재의 미주한인사회를 형성하는 한인들의 대부분은 1965년 이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초기이민
한인으로서 가장 먼저 미국에 온 사람들은 민영익을 대표로 구성된 구한말 외교 사절(보빙사) 8명으로서 이들은 1883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한인들이 최초로 미국에 집단 이민을 온 것은 1903년과 1905년 사이이다. 하와이 이민국 기록에 의하면 이때 미국에 온 한인 이민의 총 숫자는 755명의 부녀자와 447명의 14세 이하 어린이를 포함, 총 7,394명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초기 한인 노동 이민의 대다수는 미혼 청년들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동양 여자들이 드물었고 백인과 동양인의 결혼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이민 미혼 한인 청년들은 그들의 사진을 한국에 보내 선을 보고 여자를 구해오는 방법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 온 한국 부인들의 수가 1910년부터 1924년 사이에 1,066명이나 되었다. 1924년 이후는 동양인의 이민은 금지하는 미 이민법의 제정으로 한국 이민이 불가능하게 됐다.
1945년까지의 초기 한인 사회는 7,000명 내지 1만여명의 극히 적은 인구를 유지하면서도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국민회, 독립단, 흥사단, 동지회 등의 여러 단체를 형셩해 자녀들의 민족 교육에 힘썼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이민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부터 한국 전쟁이 시작된 1950년 사이에 몇 명의 한인이 미국에 왔는지는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약 100명의 유학생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대전 후 한인이 공식적으로 미국에 이민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인데 이때부터 한인들의 미국 이민은 매년 빠른 속도로 증가해 갔다.
미 이민국(INS)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64년까지 미 영주권을 취득한 한인은 총 1만5,049명에 달하고 있다. 이중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온 여성이 6,423명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 가정에 입양된 한국의 전쟁 고아가 5,348명에 달했다. 즉 이 기간에 미국에 온 한국 이민자중 미군의 부인과 미국 가정의 입양아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78%나 됐다. 나머지 3,278명은 미국 유학생으로 왔다가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1965년 이후의 한인 인구와 사회
1965년에 개정된 미국의 이민과 귀화에 관한 법령은 재미 한인 인구의 규모와 성격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1965년의 이민법은 서북 유럽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국가별 인종별 쿼타 제도를 폐지하고 가족 관계와 기술에 의거한 선별 제도를 체택했다. 이 결과로 미국 이민의 비중이 유럽국가들로부터 아시아 국가들로 기울게 됐다.
1965년 이후 한인의 이민은 중국, 필리핀계 등의 아시아계 이민과 함께 빠르게 증가했다. 1965년에는 2,000명을 조금 넘던 한인 이민자들이 1970년에는 9,000명을 넘었고 1976년부터는 3만명, 1980년 이후는 연평균 3만3,000명에 달하고 있다. 1964년 7월 1일부터 1985년 9월 30일 사이에 미국에 온 한인 이민의 수는 무려 46만,4,500명에 달한다.
지난 1990년 미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당시 미주 지역에는 85만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한인사회 구성원
드루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수여한 김일수 교수에 따르면 미주 한인사회는 지역적으로 전미국에 분산돼 있고 여러 소수 민족 사이에서 생활 기반을 다지고 있는 한인들은 교회와 언론, 동창회, 한인회, 직능단체 등의 많은 단체를 통해 결사공동체(Associational community)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본보가 발행한 2000년 한인업소록에는 뉴욕, 뉴저지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592개의 기독교회, 17개 천주교회, 19개의 불교사찰이 있으며 이밖에 수백여개의 사회 봉사단체, 동창회 등이 수록돼 있다.
미주 한인 커뮤니티는 여러 면에서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로 구성돼 있다. 한인 사회에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을 소유하고 한국어를 상용어로 쓰며 한국인으로서의 강한 의식을 갖는 한국 출생의 1세와, 평등주의적 가치관과 미국인으로서의 의식이 상하고 영어를 상용어로 쓰는 미국 출생의 2세와 3세가 있고, 그 사이에 이중 언어와 이중 문화를 소유하는 1.5세대가 있다.
한인들의 사회 관계
재미 한인들은 동창들의 모임, 각종 스포츠 및 오락, 교회 등을 통해 주로 한인들끼리 사회 관계의 망을 형성하고 있다. 한인들이 백인이나 타인종과 접촉하는 기회가 사업체나 직장에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한인들의 이와 같은 고립된 사회 단체의 유지는 한편으로는 한인들의 공동의식, 일체감, 결속력을 강화하는 작용을 하지만 다른 한편 그들의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려는 적응 과정을 늦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인들이 고립된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한인들의 언어와 문화, 가치관이 서양 사람들과 많이 다른데에 기인하지만 인종적 원인도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여러 인종들이 모여 있는 사회이지만 유럽에서 온 백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인종이라는 변수가 사회 관계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직장에서나 공적인 모임에서는 함께 섞이지만 사적인 사회 생활은 인종별로 분명하게 갈라져 이뤄지고 있다.
80대와 90년 초반까지 한인 공동체는 이웃 소수민족 집단과 긴장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백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방법은 흑인 등 타 소수민족과 단합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수민족간의 긴장감속에 뉴욕의 할렘에서는 1982년 흑인지역 단체의 명의로 ‘보이콧 코리안’이란 한인 반대 벽보가 나붙기도 했다. 1990년도에는 브루클린 처치 애비뉴의 두 한인 청과상 ‘레드 애플’과 ‘처치 푸르츠’에서 흑인 고객과 사소한 마찰로 빚어진 한흑간의 불화 갈등이 급기야 전 한인사회에 대한 흑인들의 반란시위로 확대돼, 한인사회를 아연 긴장시켰다. 이들은 흑인운동가들의 지휘를 받으며 연일 조직적인 보이콧 시위를 벌이면서 두 상점을 고사시키려 함은 물론, 이 기회에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있는 불만을 한인에 대한 시위로 관심을 끌려는 시도를 보였다.
1992년 4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경관들에게 무참히 구타당한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인해 한인 상가 밀집 지역에 폭동이 발생, 수천여명의 한인들이 하루아침에 비즈니스를 잃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속에 흑인을 비롯, 히스패닉계 소수민족을 바라보는 한인들의 시각은 바뀌고 있다. 흑인 사회의 유대관계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한흑 연대기구(OAKS)’가 창설되는가 하면 브루클린 한인회와 일부 직능단체에서는 매년 흑인 및 히스패닉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또한 한인 1.5세 및 청년 단체에서도 흑인과 히스패닉계 사회와의 유대관계를 통해 정치력 신장을 꾀하고 있다.
미래
청소년 탈선
흔희 한인 1세들은 이민의 가장 큰 목적을 ‘자녀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했던 한인사회가 자녀 교육에 큰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전교에서 1등으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비리그 명문 대학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한인 학생들도 많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청소년 탈선 문제는 뉴욕 한인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고 대두되고 있다.
특히 한인 밀집 지역인 플러싱의 경우, 한인 학생들의 갱단 가입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며 매년 9월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일부 신입생들은 한인 선배들과 갱단의 폭력 등으로 등교를 두려워하는 상황까지 달했다. 2년전에는 10대 한인 청소년들이 한인 콜택시에서 권총 강도 행위를 벌이다가 총을 발사, 콜택시 기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해 한인사회를 경악케 했다.
최근 뉴욕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한인 1.5세와 2세들이 미 주류사회에 파고들어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것이 조국을 위해 애국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인 1.5세와 2세들이 앞으로 미국의 경제와 과학, 정치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들의 탈선을 방지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인사회의 미래가 이들에게 달려 있는 만큼 한인 청소년들의 바른 성장은 그 무엇보다 더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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