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게 주제가로 삼으라며 권해준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늘도 우체국으로 향합니다. 미국 우체부 아줌마로서 일한 지도 어느 새 20개월 째입니다. 미국 이민 후 10년 6개월 동안 남편과 함께 운영해 온 햄버거 가게를 정리하고 지금은 한인들도 많이 거주하는 라크레센타 우체국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 나이 마흔 여덟… 결코 젊다고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인생의 마무리를 위해 마음을 써야 할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라면 꿈도 꿀 수 없었던 변신을 하게된 것이죠. 나는 이것을 감히 용기라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줄곧 중학교 교편생활을 하다가 1980년 무역상사의 뉴욕 지사로 발령을 받은 남편과 함께 미국에 온 나의 삶은 모든 것이 새로운 생활에의 도전이었습니다. 이 후 3년 동안 미국지사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우리는 약 4년간의 한국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후 미국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주재원 시절의 생활과는 마음가짐부터가 달랐고 역시 현실은 어려움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먼저 생계수단 마련을 위한 것과 아이들의 교육, 문화환경 등.
그래도 내 비즈니스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조그만 햄버거 가게를 사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생전 장사라고는 해 본 경험도 없이 더구나 주방 일에 서툰 우리 부부는 사사건건 부딪치고 서로의 어려움들을 상대방에게 내어던지는 거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에서와 같이 각기 자기 분야의 일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민자들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자괴감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무역회사 이사를 지낸 남편과 선생님 노릇을 해왔던 내 자신이 꼼짝없이 햄버거 가게 아저씨 아줌마로 탈바꿈하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진 않았습니다. 정말 하루하루 충실히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주어진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어렵지만 과거 속의 모습들은 지우려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두 아이들을 돌보며 필요하면 수시로 틈을 내어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지내기에 좋았으므로 그 10년 동안 햄버거 가게는 우리 가족 생활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의 두 학사들이 운영하는 햄버거 가게였습니다. 당시 우리 가게에 파트타임으로 도와주던 젊은 엄마도 미술을 전공한 분이었죠. 그 숨막히는 듯한 생활 속에서 조금이라도 내게 여유와 위안을 주었던 것은 주말 한국학교 교사로 일할 때였습니다. 적어도 토요일만은 가게를 벗어나 아이들과 종일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늘 내 마음은 우리 작은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면 우리 부부가 서로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었고, 작은 아이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즈음엔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더 이상 일 때문에 좋은 부부관계가 무너지는 것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 즈음 자주 우리 가게에 들르던 우체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그 일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은 남편, 40대 후반의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 몇 군데의 우체국에서 시험공고가 난 것을 알고 우리 둘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시험공부를 했습니다. 다행으로 좋은 성적을 받게 되었고 작은아이가 대학 입학 결정이 되었을 무렵 내가 먼저 우체국에 취직이 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지금은 남편도 다른 우체국에서 나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막상 불리어 가니 2주 동안의 트레이닝 과정에서부터 모든 순서 하나하나가 내겐 모두가 새로운 것, 두려운 것들뿐이었습니다. 우선 중학교 1학년부터 대학졸업까지 10년간 영어를 배웠다는 내가, 또 10여년 장사하며 손님들과 얘기를 했다는 내 자신이 그 곳에서 전달하는 훈련과정의 내용들을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또 둘러보면 나처럼 나이 많은 동양인 여자는 더더욱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눈치로 짐작하고 집에 오면 안내 책자들을 읽어서 이해를 보충하며 훈련과정을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편지배달의 일이 시작되어 90일간의 프로베이션(유예기간)을 또 견디어야 했습니다. 생전 처음 메어 본 우체부 가방은 왜 그리도 크고 무겁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3~4마일씩은 걸어야 하는 분량이었습니다. 비교적 라크레센타 지역은 부유한 동네이어서 우편물의 양이 많았습니다. 각종 잡지들과 캐털로그, 선전물, 소포 등이 초보자인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지요.
그 무렵 나는 1년 전부터 마라톤 훈련을 받아 오던 때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다니는 노스 할리웃 성당에 마라톤팀이 조직되어 있었는데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연습을 하였었지요. 실제로 99년도 LA 국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남편과 함께 26.1마일 전 구간을 완주하여 메달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일들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새 직업에 대한 준비로 이끌어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걸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지 무릎 통증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층계를 오를 수가 없었고 내려올 땐 앉아서 미끄러져야 했습니다. 얼음찜질과 진통제로 견디며 그래도 결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론 내가 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솟았지만 여태껏 견디어 온 과정들이 아까워 차마 주저앉질 못했습니다.
당시 우리 사무실에는 한 백인 여자와 한 흑인 여자의 수퍼바이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나를 담당하는 백인 여자는 내가 처음 출근한 날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은 역력했지만 냉혹한 인종차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의식하는 나이연대로 보아도 나보다 훨씬 젊은 여자이었죠. 곱지 않은 눈길의 수퍼바이저와 보이지 않는 갈등을 나는 견디어야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죽을힘을 다해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간 나에게 한번도 용기를 주거나 칭찬하는 일이 없었죠. 정말 지속적으로 나를 일로 조이고 멸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녀를 너무도 미워했습니다. 심지어 그 여자가 오늘 퇴근길에 교통사고로라도 죽었으면 좋겠다는 무서운 생각마저도 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큰 죄책감에 고해성사를 보기까지 했지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정말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하지만 그녀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혹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불러세워 마치 국민학교 학생을 담임선생님이 꾸짖듯 몰아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약 한달쯤 지난 후 그녀는 내게 과제(일정양의 우편물을 정해진 시간에 배달하는)를 주면서 그것을 이번 주 금요일까지 치르지 못하면 정식으로 발령 받기 위한 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일을 시작하는 시간보다 1시간 가량 일찍 사무실 근처에 도착하여 우리에게 속한 지역들의 골목골목을 운전하며 길 이름을 익히고, 각 집들의 우체통의 위치를 확인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요구하는 과제를 이미 나 자신은 이룰 수 있을 때였습니다.
그 후 그녀가 말한 약속날짜를 하루 앞두고 그녀는 다른 우체국으로 전근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내겐 이 미국이란 사회를 다시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고 그 다음에 새로 온 백인 남자 수퍼바이저는 너무도 친절하고 공평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나와 아주 친근한 동료가 되었습니다. 여하튼 90일간의 유예기간을 사고 없이, 큰 실수 없이, 처음에 비하면 아주 많은 일의 진전을 보이며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정식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누가 뭐라고 해도 USPS의 직원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만일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어느 중학교의 주임교사쯤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퇴직하여 무엇인가 시간을 보내야 할 일을 찾고 있을 그럴 나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46세의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내 자신이 늙었다던가, 시작하기에 늦었다는 느낌 없이 일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라는 것이 너무도 감사할 일입니다.
우체국 근무 1년이 지났을 때 나는 미국에 이민온 후 처음으로 2주간의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가게에 매달려 10년간 한번도 여가를 갖지 못했었지요. 모처럼의 귀중한 시간을 한국 방문의 기회로 가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떳떳하였고 한편으론 잘 견디어 낸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자랑스럽기마저 했습니다. 정직하게 열심히 노동하는 보람이 내 생활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젠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매일 매일 내게 주어지는 일에 감사하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Kim’은 빨리, 충실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루 약 600여 가정에 좋은 소식과 정보, 때론 슬픈 소식, 그리고 선물들을 전해 주며 얻어지는 봉사의 기쁨도 있습니다. 비가 내리던 겨울날엔 온 몸이 물에 젖고 편지도 젖은 채 전달되었고, 또 다가오는 여름의 뜨거움을 생각하면 그 더위를 견디며 옮겨 다녀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요.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내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겨울이 몹시도 추운 북동부 지역이나 또 항상 비가 많은 곳에서도 견디며 일하는 또 다른 많은 동료들에 비하면 이곳 LA의 날씨는 너무도 큰 축복입니다.
작년에 UCLA를 졸업하고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법대에 다니고 있는 우리 큰딸과 포모나 칼리지에 가 있는 작은딸도 늘 내겐 큰 힘입니다. 엄마가 힘들어할 때 용기를 북돋워주었고 나 자신도 아이들에게 씩씩하게 보이며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모습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새삼 내 자신을 위해서 밤낮없이 수고하며 보살펴 주시던 부모님이 기억납니다. 늘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즐거워할 일을 찾으라고요. 우리 모두에게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인생의 한몫입니까? 보다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아주 행복한 것이란 생각입니다. 나 자신도 진정 원하는 일을 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니까요.
지금 우리는 부부 우체부입니다.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내게 이 일이 지속되어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이 직업이 여자들에겐 꽤나 거칠고 힘든 일이란 생각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열심히 해 나갈 겁니다.
혹시라도 이 글이 많은 가람들에게 읽혀진다면 무언가 머뭇거리는 분들에게 나의 경험들이 위로와 용기를 드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진정 마음을 모아 찾으면 기회가 있고 또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생기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도 나는 걷습니다. 온갖 꽃들과 풀내음을 맡으며, 또 수풀 속 새소리를 반주 삼아 내 인생의 한 모퉁이를 돌아 행진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핸들의 mail truck을 운전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온 동네에 전하러 갑니다.
내가 오늘 들르는, 내 발걸음이 머무는 모든 가정마다 하느님의 참된 사랑과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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