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바람이 밀어닥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양대 한국어 신문 헤들라인만 보아도 하루 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려는 인터넷 전사 무리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민 1세대들의 ‘한풀이’가 이러한 2세들의 새 유행으로 변형되었다 : SAT, 하버드대학, 그리고 머세데스 벤즈와 수십만달러의 봉급. 물질주의로 달아오른 뉴 이코노미와 동반한 시장문화가 오늘날의 코리언아메리칸 젊은이들사이에 미친 듯이 넘쳐흐르고 있다. 들끓는 미국의 도심지에서 삶에 허덕이고 있는 이민자들이 그 어느때보다도 고립, 소외되고 이용당하고 있고 취약하며 이들이 다음 화재에 대비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LA한인타운은 영원히 잊혀져가고 있다. 지난 번 화재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건전함과 위엄이라는 이름하에 나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세대를 위한 진정한 롤 모델을 찾기 위해 잊어버린 과거의 영혼들을 불러오기로 했다. 미래로의 회귀: 4.29폭동의 악몽과 타고남은 재 너머로 두명의 젊은 영웅이 아련히 나타난다. 한 사람은 폭도들의 공격에서 상점주인들을 구하러 왔다가 죽었던 열여덟살난 대학생이다. 에디 리는 죽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친구 제임스 강은 두 그룹의 무장 방위대 사이에 벌어진 총격 세례속에서 약탈꾼으로 오해받아 총을 맞고 만 것이다. 그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지나가던 그의 동포는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곤 에디가 피 흘리고 죽게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제임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갇혀있던 힘없는 동포를 방어하기 위한 에디의 엄청난 희생은 코리언아메리칸 역사의 가장 암흑기에 멀리서 방관하고 있었던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들(몇명을 제외하고)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초라한 동네 소년이었던 에디가 4.29의 외로운 명예회복의 상징 -- 순교자로 추앙된 것이다. 그러나 8년이 지난 후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그가 누군지 알고자 하는 사람도 몇명 안된다. 코리안 아메리카여 에디 리를 위해 울지 말라. 그는 큰 하늘에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 자신의 이기심, 분열, 파렴치함을 두고 울어라. 또 한 영웅은 살아있는 사람으로 에디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따르고 있다. 그는 중재인이요 장래가 촉망되는 민권 변호사로 황폐한 도심지 L.A.의 소외되고 내팽개쳐진 사람들을 변호하는 일을 하고 있다. 거의 10년전 나는 도 김을 처음 만났다. 당시 하버드대 신입생으로 코리안아메리칸 학생컨퍼런스(KASCON) 조직을 도왔던 그는 연사로 초청된 나를 접대하는 일을 했다. 그는 흑인 빈민가의 독특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내가 만난 두 번째 한국인이었다. 첫 번째 사람은 샌ㅋ틴형무소 사형수였던 이철수로 그는 아동기와 사춘기를 거의 소년원과 감옥에서 보냈었다. 두사람 모두 거친 거리에서 자랐다. UCLA법대 2학년 여름방학에 도 김은 전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와 교육기금(LDF)에서 서기로 일하며 진행중이던 인종차별 소송건들에 관여했다. 흑인과 라티노, 필리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편견된 정책 및 시행을 이유로 UC이사회를 상대로 제기된 소송건이라든지 유색인종, 빈곤층 근로자, 노인, 이민자가 대부분인 버스 이용자들에게 버스 서비스를 확대하고 향상시키라는 LDF의 명령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살피고 강화시키는 일, LAPD 라파엘 페레즈 경관이 근무했던 람파트경찰서 스캔들과 관련된 소송건 등을 다루었다. ‘도’는 세 살때, 한 살 아래인 동생 ‘대’와 함께 코리아타운의 심장부에 있던 킹슬리길 아파트에 ‘엄마’ ‘아빠’와 함께 보금자리를 얻었다. 아빠는 망가진 자동차를 고치는 일을 했는데 하루에 16-20시간씩 일했다. 그가 부모와 함께 지내는 유일한 시간은 주말에 스왑밋이나 플리마켓에서 도자기들을 판매하는 부모를 따라갈 때 뿐이었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고 집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토요일에 아드모어공원으로 걸어가 무료급식받는 대열에 끼어들기도 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는 우리가 좋은 가치관을 가지고 자라게 했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한달 렌트비가 100달러였던 집을 나서면 길거리에는 갱 총격, 자살, 마약남용, ‘죽은 영혼’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어른아이는 빨리 자라났다. 하버드대학에서 흑인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는 한인과 흑인들의 상호 무지와 증오를 목격했다. 그는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한인타운의 집으로 돌아가 무엇인가 일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18년간 흑인과 라티노 고객이 대부분인 사우스센트럴의 햄버거가게에서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보며 그는 중재인이 되려는 야망을 더욱 붇돋았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흑인 민권단체와 함께 흑인 빈민가에 있는 청소년 서비스, 교도 프로그램울 위해 일했다. 4.29폭동이 일어나기 1년전 여름, 그는 소이탄, 보이콧, 무분별한 살인이 횡행하는 한인타운으로 돌아와 한흑연맹과 함께 중재자로 활동했다. 거의 미친 듯이 일하며 그는 자신이 중재인으 삶을 살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92년 4월29일, 하버드대학 기숙사에 앉아서 한인타운이 불타는 장면을 텔리비전을 통해 보며 그는 숨막힐 지경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무엇인가를 하라고 말하는 내 불타오르는 영혼에 귀기울였다.” 그는 이를 행동에 옮겼다. 이곳에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 지도자를 양성하고 훈련하는 코리언아메리칸 청소년지도자프로그램(KAYLP)을 이듬해 KYCC에서 설립했다. 200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지도자 역할을 하기 위한 관문을 거쳐갔다. KYCC에서의 두 번째 해에 그는 과거 또는 현재 갱단원 여섯명과 함께 갱인식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에서 아시안갱 관련 첫 훈련프로그램으로 간주되고 있다. 코리아타운 갱 생활상을 담은 그가 만든 45분짜리 비디오는 널리 알려져있다. 그는 흑인과 라티노 사회운동가들과 힘을 합해 코리아타운과 라티노 피코-유니언, 흑인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평화와 생산 활동을 도왔다. ‘다인종청소년리더십협동’으로 이름지어진 이 작업은 로스앤젤레스카운티에서의 인종간 팀웍을 위한 유일한 실천모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법대에서 2년간 ‘새미국인을 위한 폴 & 데이지 소로스 펠로십‘으로부터 4만달러의 장학금 수혜자로 올해 통지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37개국 출신 800명이 이 장학금을 지원, 30명이 최종 결선자중에 그가 포함된 것이다. 반이민 정서 고조로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무작위적 폭력이 증가함에 따라 한인들이 한풀이(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금전적 성공을 추구)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구시대의 엘리트주의 지위 특권에 하이텍 장식을 붙인 신종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새 유교사상의 어두운 유산이 그 추한 머리를 치켜세우고 있다. 남가주에서만도 한인변호사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그들중 민권/지역사회변호 분야에서 정진하고 있는 변호사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나는 분노를 넘어서 슬픔을 느끼고 있다. 도 김 같은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이 우수 인재중에서는 극히 드물기에 그들은 실질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도 김은 아시안 아메리칸들사이에서 낙오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몇 명 안되는 빛나는 인물이다. 이러한 우리들 사이의 멸종위기 인물들이 그들 각자의 노력에 대해 찬사와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 하겠다. 경험과 통찰력으로 도 김이 NAACP에서 제 몫을 얻게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취약한 이민자커뮤니티를 위해 유사한 민권조직 설립을 돕도록 우리가 그와 지역사회운동가들을 응원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역사회 자각이라는 대의 명분을 위해 젊은 목숨을 희생한 에디 리의 불멸의 기억에 맞는 선물이 될 것이다.
이 경원
새 바람이 밀어닥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양대 한국어 신문 헤들라인만 보아도 하루 아침에 백만장자가 되려는 인터넷 전사 무리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된다. 이민 1세대들의 ‘한풀이’가 이러한 2세들의 새 좌우명으로 변형되었다 : SAT, 하버드대학, 그리고 머세데스 벤즈와 수십만달러의 봉급이라는 목표물이다 .
물질주의로 달아오른 뉴 이코노미와 동반한 시장문화가 오늘날의 코리언아메리칸 젊은이들사이에 미친 듯이 넘쳐흐르고 있다.
들끓는 미국의 도심지에서 삶에 허덕이고 있는 이민자들이 그 어느때보다도 고립, 소외되고 이용당하고 있고 취약하며 이들이 다음 화재에 대비되어 있지 않다는 우려는 아예 없애는게 낳겠다. LA한인타운은 영원히 잊혀져가고 있다. 지난 번 화재가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어쨌든, 건전함과 위엄을 버리지 못해서 나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세대를 위한 진정한 롤 모델을 찾으려고 잊어버린 과거의 영혼들을 불러오기로 했다. 미래로의 회귀: 4.29폭동의 악몽과 타고남은 재 너머로 두명의 젊은 영웅이 아련히 나타난다. 한 사람은 폭도들의 공격에서 상점주인들을 구하러 왔다가 죽었던 열여덟살난 대학생이다. 에디 리는 죽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친구 제임스 강은 두 그룹의 무장 방위대 사이에 벌어진 총격 세례속에서 약탈꾼으로 오해받아 총을 맞고 만 것이다. 그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지나가던 그의 동포는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곤 에디가 피 흘리고 죽게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제임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포위된채 힘없는 동포를 방어하기 위한 에디의 엄청난 희생은 코리언아메리칸 역사의 가장 암흑기에 멀리서 방관하고 있었던 미국서 교육받은 엘리트들(몇명을 제외하고)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돌이켜보건대 순박한 동네 소년 에디가 4.29의 외로운 명예회복의 상징, 즉- 순교자로 부상된다. 그러나 8년이 지난 후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나, 그가 누군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몇명 안된다.
코리안 아메리칸이여, 에디 리를 위해 울지 말라. 그는 큰 하늘에서 우리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차라리 우리 자신의 이기심, 분열, 파렴치함을 두고 울어라.
그런데, 살아남은 자로서 에디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따르는 인물이 있다. 그는 황폐한 도심지 L.A.의 소외되고 내팽개쳐진 사람들을 변호하는 일을 하려 열심히 뛰는 중재인이요 장래가 촉망되는 민권 변호사로 부상하고 있다.
그는 10여년전에 만났던 김 도형이다. 당시 하버드대 신입생으로 코리안아메리칸 학생컨퍼런스(KASCON) 조직을 맡아서 나를 연사로 초청해서 알게됐다. 그는 내가 만난 한인으로서 흑인 빈민가의 독특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두번째 사람이었다. 첫 번째 사람은 샌쿠엔틴형무소 사형수였던 이철수였다. 그는 아동기와 사춘기를 거의 소년원과 감옥에서 보냈었다. 두사람 모두 거친 거리에서 자랐다.
도형군은 현재 UCLA법대 2학년으로 여름방학동안 흑인민권단체인 전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산하 기구인 법적 변호 교육기금(LDF)에서 일하고 있으며, 현재 계류중인 인종차별 소송건들을 다루고 있다. 흑인과 라티노, 필리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편견된 정책 및 시행을 이유로 UC이사회를 상대로 제기된 소송건이라든지 유색인종, 빈곤층 근로자, 노인, 이민자가 대부분인 버스 이용자들에게 버스 서비스를 확대하고 향상시키라는 LDF의 명령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살피고 강화시키는 일, LAPD 라파엘 페레즈 경관이 근무했던 람파트경찰서 스캔들과 관련된 소송건 등을 다루고 있다.
도형군은 세 살때, 한 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코리아타운 심장부인 킹슬리 드라이브 아파트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살았다. 아빠는 망가진 자동차를 고치는 일을 했는데 하루에 16-20시간씩 일했다. 그가 부모와 함께 지내는 유일한 시간은 주말에 스왑밋이나 플리마켓에나가 도자를 파는 부모를 따라갈 때 뿐이었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고 집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토요일에 아드모어공원으로 걸어가 무료급식받는 대열에 끼어들기도 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는 우리가 좋은 가치관을 갖고 자라게 했어요.”라고 그는 회상했다.
한달 렌트비가 100달러였던 집을 나서면 길거리에는 갱 총격, 자살, 마약남용, ‘죽은 영혼’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어른아이가 된 그는 빨리 성장했다.
하버드대학에서는 흑인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는 한인과 흑인들의 상호 무지와 증오를 목격하고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한인타운의 집으로 돌아가 무엇인가 일할 꿈을 가지게 됐다. 그러면서 지난 18년간 흑인과 라티노 고객이 대부분인 사우스센트럴의 햄버거가게에서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보며 그는 중재인이 되려는 야망을 더욱 붇돋았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흑인 민권단체와 함께 흑인 빈민가에 있는 청소년 서비스, 교도 프로그램울 위해 일했다. 4.29폭동이 일어나기 1년전 여름, 그는 소이탄, 보이콧, 무분별한 살인이 횡행하는 한인타운으로 돌아와 한흑연맹과 함께 중재자로 활동했다. 거의 미친 듯이 일하면서 자신이 중재인으 삶을 살 것임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92년 4월29일, 하버드대학 기숙사에 앉아서 한인타운이 불타는 장면을 텔리비전을 통해 보면서 그는 숨막힐 지경이 됐다. “내 고장으로 돌아가 무엇인가를 하라고 말하는 내 불타는 영혼에 귀기울였다”고 했다.
그는 곧 행동으로 옮겼다. 내 고장에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 지도자를 양성하고 훈련하는 코리언아메리칸 청소년지도자프로그램(KAYLP)을 이듬해 KYCC에서 설립했다. 그후 200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지도자 역할을 하기 위한 관문을 거쳐갔다. KYCC에서의 두 번째 해에 그는 과거 또는 현재 갱단원 여섯명과 함께 갱인식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미국에서 아시안갱 관련 첫 훈련프로그램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가 코리아타운 갱 생활상을 담아 만든 45분짜리 비디오는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아울러, 흑인과 라티노 사회운동가들과 힘을 합해 코리아타운과 라티노 피코-유니언, 흑인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평화와 생산적 활동을 시행하는데 도왔다. ‘다인종청소년리더십협동’으로 이름지어진 이 작업은 로스앤젤레스카운티에서의 인종간 팀웍의 유일한 실천모델이 되고 있다.
그가 법대에서 2년간 ‘새미국인을 위한 폴 & 데이지 소로스 펠로십‘으로부터 4만달러의 장학금 수혜자로 통지받은 것은 당연하다. 137개국 출신 800명이 이 장학금을 지원, 30명이 최종 결선자가 된것에 그가 포함된 것이다.
반이민 감정고조로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무작위 폭력이 증가함에 따라 한인들은 한풀이(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금전적 성공을 추구)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 구시대의 엘리트주의인 지위, 특권에 하이텍 장식을 붙인 신종 양반들이 생겨나고, 새 유교사상의 어두운 유산이 그 추한 머리를 내세우고 있다.
현재, 남가주에서만 한인변호사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그들중 민권/지역사회변호 분야에서 정진하고 있는 변호사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나는 분노를 넘어 슬픔을 느낀다.
김 도형 같은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은 우수 인재중에서 극히 드물기에 그는 실질적으로 사라져가는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사이에서 낙오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몇 명 안되는 빛나는 인물이다.
이같은 멸종위기 인물들은 그들 각자의 노력에 대해 찬사와 지속적 지원을 받아야 마땅하다. 경험과 통찰력으로 김 도형군이 NAACP에서 제 몫을 얻게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취약한 이민자커뮤니티를 위해 유사한 민권조직 설립을 돕도록 그와 지역사회운동가들을 응원해야 할 때가 됐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역사회 양심이라는 대의 명분에 젊은 목숨을 희생한 에디 리를 기리는 적합한 칭송이 될 것이다.
필자는 미국내 아시안 원로 언론인이며 본보 영문판 편집인을 지냈고, 이번 가을 UCLA에서 작년에 맡았던 강좌 “심층 조사의 언론?유색인종 커뮤니티와 캘리포니아 패시픽 림 모재이크”를 가르친다.
(이 커멘터리의 영문글은 3면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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