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랭 들롱(64)을 처음 보고 반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명동극장에서 영화 ‘태양은 가득히’(Purple Noon·60)를 보고 나서였다. 가난한 청년 리플리역의 들롱이 자기의 부자친구 필립을 바다 한복판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필립의 신원과 함께 그의 애인 마지 마저 차지하는 연기를 표독스럽고 살기차게 해내는 것을 목격하면서 어린 나는 완전히 들롱에게 매료되고 말았었다.
들롱의 비수 같은 새파란 눈동자와 약간 야윈 듯한 벗어제친 상체 그리고 신고 있는 간편화 속으로 살짝 보이는 맨발과 함께 날렵한 동작 등 그의 모든 자태와 태도와 행동이 뿜어내는 자극미는 가히 현기증이 날만한 것이었다. 당시 이 영화를 본 동급생 중 일부는 들롱의 흉내를 낸다며 맨발에 간편화를 신고 등교했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야단을 맞을 정도로 들롱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들롱처럼 가난했던 나는 그의 부에 대한 갈증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그의 범죄행위에 동조했었는데 들롱이 마지막에 경찰에 체포될 때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론 나는 들롱의 영화가 나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구경했는데 갱영화와 액션영화들도 재미있었지만 그런 것들보다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이탈리아의 명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흑백 ‘일식’(The Eclipse·62·사진)이었다. 로마라는 현대도시에 관한 분석이자 그 속에 사는 현대인들의 소외와 고독과 권태 및 대화 단절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 틴에이저였던 나로서는 완전히 흡수하기가 힘들었지만 작품이 파고드는 감정의 황무지 현상은 한창 지식욕과 감수성이 풍부하던 나를 심각하게 자극시켰었다.
이 영화는 특히 어딘가 먼데를 응시하는 듯한 눈동자를 지녔던 약간 정신나간 듯한 이탈리아 여배우 모니카 비티의 표현력 아름답고 풍부한 얼굴이 인상적인데 권태에 젖은 비티와 그의 연인으로 부를 탐욕스레 찾는 스탁 브로커인 들롱이 모두 랑데부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라스트 신이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또하나 잊지 못할 장면은 들롱이 자기 옆을 걷는 비티의 열린 블라우스 틈으로 드러난 젖가슴을 훔쳐보는 모습. 카메라가 둘을 트래킹 샷으로 쫓아가며 보여주는 이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은근히 선정적이다.
알랭 들롱은 보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눈부시게 잘 생긴 얼굴과 위험스럽고 안과 밖이 다른 이중성의 분위기를 지닌 배우로 상업적 영화와 예술적 영화 모두에서 성공한 국제스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여러 가톨릭 학교에서 쫓겨난 뒤 푸줏간서 일했다. 17세 때 해병특공대로 입대, 인도차이나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다. 제대후 시장서 잡일을 하다 미모 때문에 영화계로 들어섰는데 그의 첫 히트작이 ‘태양은 가득히’(이 영화는 작년 맷 데이몬 주연의 ‘재주꾼 리플리’라는 제목의 신판으로 상영됐었다).
들롱은 르네 클레망, 루키노 비스콘티, 안토니오니 등 세계적 거장들의 영화에 나왔으면서도 미모 때문에 한동안 예쁜 배우라는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했었다. 그는 영화에서 뿐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역동적이요 공격적인 사람으로 1964년에는 자신의 제작사 아델을 설립, 영화제작과 출연을 함께 했다.
1968년 후반 들롱의 바디가드가 파리의 한 쓰레기더미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면서 들롱과 당시 그의 아내였던 배우 나탈리는 살인과 마약과 섹스 스캔들의 중심인물로 등장, 파리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요란했었다. 정계와 연예계 거물들이 관계된 이 스캔들은 쉬쉬하며 흐지부지 됐었는데 들롱은 당시 배우가 되기 전의 자신과 지하 범죄세계와의 관계를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스캔들로 들롱은 오히려 영화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도 ‘터프가이’라는 이미지를 갖추게 됐었다.
들롱의 영화 7편이 LA 카운티 뮤지엄(5905 윌셔) 빙극장서 상영된다. 상영시간 모두 하오 7시30분.
△8일 ▲‘태양은 가득히’ ▲‘지하실의 멜로디’(Any Number Can Win·63)-들롱이 코주부 명배우 장 가뱅과 팀을 이뤄 해변 휴양도시 카지노의 금고를 턴다.
△9일 ▲‘사무라이’(Le Samurai·67)-고독한 킬러와 그를 쫓는 형사들간의 도주와 추격 그리고 살인목격자인 아름다운 여자 피아니스트간의 운명적인 감정연계를 그린 실존적 범죄영화 ▲‘누벨 바그’(Nouvelle Vagul·90)-매력적이요 갑부인 부부를 통해 성과 정치적 문제를 다룬 고다르 감독작.
△15일 ▲‘수영장’(The Swimming Pool·69) ▲‘내게 살인할 권리가 있는가?’(Have I the Right to Kill?·64)-두 작품은 거의 재상영 안되는 희귀품이다.
△16일 ▲‘일식’ (323)857-6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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