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대졸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결혼풍조가 있었다. 선보고 그 다음주약혼하고 그 다음주에 식 올리는 속성 결혼. 상대는 ‘재미 청년실업가’들이었다.
60년대 후반 이민문호 개방후 미국에 갔던 청년들이 그 즈음 자리를 잡고 신부감을 찾아 고국방문하는 것이 붐이었다. 대개 없는 시간 쪼개서 나오다 보니 김포공항에 도착하면서 부터 줄줄이 잡혀 있는 맞선을 보고, 대충 ‘이 사람이다’ 싶으면 그날로 약혼날짜 잡고, 한주쯤 후 결혼식 올리고 신혼여행 다녀온 후 훌쩍 미국으로 떠나가는 그런 신랑들이었다.
‘청년 실업가’라고만 소개될뿐‘실업’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도 파악할 틈 없이, 기껏 한두주 같이 지내고 가버리면 얼굴도 가물가물한 사람과 평생을 기약하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순전히 ‘미국’이라는 말에 담긴 마력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한 여성도 그즈음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결혼식을 올렸는 데 이유는 “지상의 낙원이라는 미국에 가서 한번 살아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치의 의혹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완벽했던 미국의 이미지는 한국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8월중순 10여일 서울에 머물렀는 데 영어학습 열기는 더 심해진 것 같고, T.G.I.F. 베니건스, 코코스 같은 미국식당들은 여전히 붐볐다. 그러나 ‘미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는 별도로 ‘매향리’ ‘주한미군 지위협정’등 몇몇 고유명사로 상징되는 미국의 부당성, 혹은 ‘횡포’에 대한 저항감이 사람들의 가슴에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는 느낌은 한편으로 대견하고 한편으로 불안했다. 8.15 광복이후 미국·미군은 한국의 안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한국은 종종 주권국가로서의 권리나 자존심을 접어야 했다. 50년 동안 미국·미군은 그렇게 ‘군림’했는데 이제 비로소 그 잘잘못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한국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자각이 감정으로 마구 발산되는 위험성이다. 남북한 화해 분위기와 맞물려 강도가 심해진 반미감정에 대해 주한미군 병사들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미국대사관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미군의 아내인 이명남씨를 만나 그들 부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의 남편은 아이리시 2세로 백부가 한국전에서 전사했고, 아버지도 한국에 파병된, 한국과는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여성과 결혼했고 한국말도 잘하는 그는 한국의 ‘반미’가 너무 감정에 치우쳐있다는 지적을 했다.
“병사들이 아주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부모에게 전화해 한국에 있기가 겁난다는 말들을 합니다. 모두 외출을 피해서 요즘 이태원에 가보면 거리가 텅비었어요”
미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대낮에 길거리에서 이유없이 폭행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감정적 ‘반미’가 미국을 자극할 경우를 우려했다.
“걸프전 당시 디트로이트에 있었는 데 이라크계 내 친구들이 자주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라크계를 구분하기 어려우니까 아랍인 비슷하면 이유없이 두들겨 맞았지요”
미국은 ‘공격을 당하면 필히 보복하는 나라’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국에서 미군병사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미국의 코리안, 혹은 아시안이 보복 당하는 일이 필시 일어나고 말것이라고 그는 염려했다. 머지않아 제대하면 미국에서 살 계획인데 “아내가 코리안이니 걱정이 된다”고 했다.
70년대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 동경은 곧잘 개인적 불행들로 연결되었다. 얼굴 몇번 보고 결혼한 후 입국수속 밟아 미국에 가보니 남자에게 동거녀가 있더라, 아이까지 있더라는 후문들이 당시 여자 동창들 사이에서는 심심찮게 들렸다.
눈먼 선망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눈먼 미움이다. 상하구도 형식이던 한미관계가 수평구도로 바로잡아져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수 없다. 그러나 사안이 중요할수록 감정은 자제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감격이 절절히 흐르는 전광판을 보고, 바로 밑 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대를 막기위해 대기중인 전경들의 피로한 모습을 보는 느낌은 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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