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2000년 6월호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임스에 실렸던 ‘한국전 참전경험’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나는 1950년 1월 시카고의 레인테크니컬고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학(샴페인-어바나 소재)에 2월 진학했다. 한국전쟁은 그해 6월에 발발했다.
비록 반세기전밖에 안되지만 미국에서는 대학진학이 비교적 드문 편이었다. 레인고교같은 명문교에서도 졸업반 학생의 10퍼센트정도만 대학에 진학했다. 이처럼 대학에 가는 학생이 극소수였으므로 대학생은 군복무에서 면제됐다.
나는 출생지인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에 있었으므로 전쟁의 참상에 아랑곳없이 안전을 누리고 있었다. 전쟁초기 상황이 신문과 텔리비전을 통해 보도되면서 나는 내 몫을 다하지 못함에 죄책감을 느꼈다.
특히 한국인도 아닌 고교동창들이 전장에서 죽거나 부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내 죄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1951년말 나는 순전히 한국에 가기 위한 목적에서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군에 징집당했을 경우에는 의무 복무연한이 2년이었으나 자원 입대하면 그것이 3년이었다. 나는 징집면제자였으므로 입대하면 3년을 복무해야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2년 복무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전시에는 전쟁터(한국)에서 1년만 있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즉 나는 1년동안 한국에 가있기 위해 학교를 3년이나 떠나있어야만 할 형편이었다.
결국 길을 찾아냈다. ‘자원 모병’ 요청을 허용하는 법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한 것이다. 2년 자원병 자격을 받았으며 이는 내 형편이 꼭 맞는 것이었다.
2년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복무하기로 되었다. 신병 훈련소에서 3개월, 특수 훈련 3개월, 전투 훈련 3개월, 한국에서 1년, 그리고 미국에 돌아와서 시카고 인근에 있는 그레잇레익해군기지에서 제대를 기다리며 3개월을 보내게 될 예정이었다.
한국에 가는 것 외에는 어떤 군대에 속하든지 상관없었다. 당시, 해병대 전사자가 많아서 해병대를 채울 자원병이 충분치 않았다. 해병대는 항상 자원병 그룹이었다. 1952년 초 석달을 제외하고 해병대로 징병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해병대가 되었다.
지금은 비록 모든 것이 끝났으나 아마도 내가 다른 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훈련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고 그 후에도 해병대 전통을 따라 어디를 가든 스트레스가 있었다.
우리 소대는 분명 우수한 신병으로만 구성된 듯 싶었다. 대대 행진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훈련교관이 좀 무디어보이는 사람 10명을 뽑아 그들은 몸이 아프므로 행진대회동안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우등 소대로 졸업했고 모두 진급했다. 이제 신병이 아니라 일등병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해병대에 출신국에의 파병을 허용하지 않는 규정이 있음을 알게 됐다.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금 해결책을 알아보았고 또한 찾아냈다. 특별훈련코스 성적에 따라 복무하고 싶은 곳으로 파병해주는 상급 규정이 있었으며 군사직업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임을 알게 됐다. 이로써 나는 특별엔지니어링 코스에서 최선을 다하게 됐다.
그 반에 70명이 있었는데 나는 3등을 했다. 문제는 한국에 두명만 배치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두명중에 내가 뽑히지 않을까봐 며칠간 걱정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한국에 배치된 사람은 클래스 성적이 꼴지였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세계 곳곳에 평화로운 기지가 얼마나 많은데 제 정신으로 전장에 나가겠다고 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나서 3개월간 전투훈련이 있었으며 그 일부가 추위 훈련이었다. 해병이 2차대전때 남태평양에서 싸웠을 뿐 북한과 같은 혹한에서 싸운 적이 없었다. 내가 오늘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이 경험은 훈련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군대수송대열이 끼어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마침내 한국에 가게 된 것이다.
배는 매우 민주적으로 조직돼있었다. 장교가 배의 절반을, 사병이 절반을 차지했다. 문제는 장교가 200명이었고 사병이 3000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장교는 배 상층부 절반을, 사병은 수면아래가 대부분인 배의 하부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게 미 해병대의 삶인데 어찌하랴.
배가 태평양을 건너는데 20일 걸렸고 그 사이에 일요일이 3번 있었다. 나는 (추측컨데 옛 버릇대로) 자청해서 의자를 정리하고 예배를 위한 찬송가와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샌디에고 항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첫 일요일 예배에는 그다지 많이 참석하지는 않았다. 항해의 절반쯤에 있었던 두 번째 예배에는 참석자가 많아 자리가 꽉 찼던 것 같았다. 인천항 도착 직전에 있었던 마지막 예배에는 2부 예배가 필요할 정도였다. 하나님이 필요없다거나 강인한 해병대 가슴에 하나님은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틀린 말이었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짐을 풀기도 전에 장교실로 불려가 서울에 있는 할머니를 만나보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미처 내가 알기도 전에 통신병 겸 운전병과사진사와 함께 짚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게 됐다. 어쨌든 그들이 할머니집을 찾아내 나와 할머니 사촌, 조카들과 함께 사진을 찍게 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과부였던 사촌 하나가 내게 돈을 주며 PX에서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소의 일이라 생각하고 이를 기꺼이 했다. 그런데 PX문을 걸어나오자 헌병 두명이 나를 멈추게 하더니 금지품을 가지고 어디로 가려하는지 물었다. 나는 한국에 머문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내가 불법으로 미군복을 착용한 한국 민간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함께 있던 운전병이 해명해주었다.
서울에 하루 더 있게 되어 나는 어릴 때 나를 공중 목욕탕에 데리고 가곤 했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노세우씨를 찾아갔다. 당시에 아버지가 미국에 가고 없을 때여서 나를 공중목욕탕에 데리고 갈 성인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늦게 나는 어릴 때 시카고에서 농구와 소프트볼을 함께 하며 자랐던 친구 딕 토머스를 찾아갔다. 떠나면서 나는 그에게 당시로서는 상당액이었던 100달러를 요청했고 그는 한마디 묻지도 않고 내게 100달러를 주었다. 나는 그에게 이를 평생 감사하고 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여전히 평생 친구로 지내고 있다.
서울을 떠나면서 할머니와 친척에게 눈물로 작별했다. 며칠내로 북쪽의 비무장지대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100달러를 드렸다. 훗날 알게 된 바, 할머니는 내가 친구에게서 얻어서 드린 그 돈으로 3개월간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한다.
며칠 후, 복무지에서 나는 해외주둔 미군신문인 ‘성조지’를 한 부 받았다. 헤들라인 기사가 해병1사단이 크리스마스를 위해 집에 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해병1사단 전체가 한국에 주둔해있음을 뜻하는 말장난이었다.
서울로 돌아왔다가 우리 부대는 트럭을 타고 북으로 향했다. 트럭에서 상사가 “잠그고 채우라”고 외치자 내가 전장에 있음을 난생 처음으로 실감하였다. 그후 5개월간 임진간 남쪽둑에 복무하며 침입자들을 순찰하고 벙커를 구축했다.
나는 집을 떠나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됐다. 텐트에는 10명이 있었고 가능한 한 마음을 편히 먹으려고 애썼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텐트밖 언덕에 있던 나무를 잘라 맥주캔으로 장식했더니 그다지 보기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라디오가 “크리스마스를 위해 집에 갈거예요.” “화이트 크리스마스” 노래를 하루 종일 들려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해병대로서 비교적 강인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때 며칠간 눈시울을 적시지 않았던 사람을 나는 그다지 볼 수 없었다.
한국 해병대와 미군 해병대가 벙커 건설을 나누어 책임지고 있었다. 한국 해병대가 구멍을 파면 미해병대가 나무와 모래주머니로 윗부분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중장비가 없어서 땅파는 작업을 곡괭이와 삽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1월과 2월에는 땅이 얼어서 파기가 불가능했다.
한국군이 땅을 파주지 않아서 미군인 우리가 벙커를 지을 수 없고 책임목표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지휘관이 무척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나더러 통역인으로 한국군 지휘관에게 가서 부하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라고 했다.(내 한국어가 최선을 다해도 그다지 좋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한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고 한국해병대를 본 적이 없었고 상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군 지휘관에게 가서 땅 파는 작업에 진전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짐작도 못하고 있을 때 그는 부하들을 불러 줄세운 후 두께 2인치 폭 4인치짜리 나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어서면 또 때리고 일어서면 또 때렸다. 나는 그 광경을 도저이 볼 수가 없어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그때 한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메시지를 전하거나 통역할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해병대 병사들이 내게 화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를 동료로 생각했다. 그후 시간이 비어 인근 마을에 술마시러 갈 때는 나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지역이 미군에게는 전투지로 간주됐으나 한국군에게는 휴식지로 생각되는게 내게는 불합리하게 보였다.
맑은 날이면 임진강 건너편에 있는 군인들이 보였다. 물론 그들도 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규정상 적군으로부터 받은 박격포수가 한달에 20여회를 넘으면 우리는 ‘전투 수당’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일등병 월급이 60달러였다. 이에 더해 해외주둔 40달러, 전투 수당 50달러를 받았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월 100달러, 150달러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육군대위였던 내 사촌 봉급이 월 2달러였으므로 이와 비교하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전투수당’에 필요한 한달간의 박격포 수가 우리 소대에 채워지면 사령관은 다른 소대와 위치를 바꾸게 해 그 소대가 ‘전투 수당’ 유자격이 되게 했다. 강폭이 좁은 지역에서는 적군의 박격포가 넘어오기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용의했다. 우리 지휘관은 보고서에는 사병들의 위험부담을 공평하게 하기 위해 주둔 위치를 바꾸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1953년 4월 무렵, 휴전협정이 마무리지어가고 있으므로 조만간 포격이 멈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내가 문산리 지역으로 배치되면서 그 소문에 내게 현실이 되었다.
1953년 5월, 문산리에 당도하자 미군과 한국군 해병대로 구성된 포로접수팀이 조직돼있었다. 전선에서의 영웅적 활약을 근거로 뽑힌 50명의 미 해병이 귀환하는 포로들을 환영하고 들 것을 드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귀환 포로들을 받을 장소를 준비하고 귀환자를 받는 연습훈련을 받으면서 우리는 서로 친하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그들 모두 전투에서 맹활약했던 전력이 있으므로 나는 제자리에 있지 않은 기분이었으나 그들은 나를 감싸주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가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겸손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전투 체험을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이야기해야 비로소 이를 드러내곤 했다. 내가 한국에 오기 전에는 맥주를 많이 마시지 않았으나 그해 여름에는 마치 잃었던 시간을 보충하려는 듯했다.
마침내 3년 1개월 2일의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됐다. 휴전일이 1953년 7월27일로 정해졌다. 양측의 모든 군인과 보급품, 장비는 3일내에 그 지역에서 철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양측은 무기를 철수시키기보다는 모두 소비해버리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전쟁 마지막 주의 전사자수가 전쟁 총 전사자의 3분의 1이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얼마나 경솔한 인간의 비극적 결정인가.
나는 판문점 정전지역에 있어서 안전했다. 이 천국에서 나는 중무기 전투가 계속되는 소리를 며칠간 들었다.
마침내 대 교환의 날이 시작됐다. 1953년 8월5일 오전 9시였다. 25명의 포로를 태운 트럭이 매 시간마다 4대씩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내려오도록 계획돼있었다. 트럭 4대 호송의 일환으로 환자나 불구자를 실은 앰뷸런스들도 함께 왔다.
귀환 포로들의 명단이 미해병대 장교에게 주어지면 그가 명단을 내게 건네주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그들은 대답하고 트럭에서 내려 자유를 찾았다. 그들중 일부는 한국전 이전부터 포로였던 사람도 있었다.
그때 나는 한국어를 잘 읽지 못했으나 최선을 다했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어쨌든 누군가다 대답하며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꽤나 잘 읽는 줄 알고 뽐내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명단에 적혀있는 이름 순서가 트럭에 앉아있는 순서와 일치해 내가 어떤 식으로 이름을 부르든 그 다음 사람이 뛰어내렸던 것이다. 내가 이름을 잘못불렀다고 해서 그들이 트럭에 그냥 앉아있을리 만무했던 것이다.
트럭에서 내린 후 어떤 사람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들에게는 오랜동안 보지 못했던 자유의 첫 신호였다. 그들은 나를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았다. 그것은 내가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귀환포로 환영그룹이었던 우리는 그들을 돌보고 수속밟아주는 그룹들과는 달리 다음 트럭대열이 도착할 때까지 쉬는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짚차에 앉아있던 어린 인민군 운전병을 몇차례 찾아냈다. 장난기가 발동하면 차에 올라가 그 옆에 앉아 내 친구에게 사진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인민군이 보였던 공포심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후에 한국군 해병대 장교가 설명한 바로는 아마도 그 인민군이 상사의 눈에 나와 너무 친한 것으로 비쳐질까 두려워한 반응이었을 것이라 한다. 나는 너무 젊었었다. 나의 경솔한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스트레스에 대해 생각치 않았던 것이다.
북한/중공군 팀의 복잡함, 예측불허함을 감안할 때 포로교환은 비교적 순조롭게 끝나갔다. 포로가 됐던 윌리엄 딘 육군소장이 돌아올 때는 약간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장군이 문산리로 올 때 탈 차로 보통의 앰뷸런스 대신 세단을 준비했다. 북한군들은 ‘특권층에게 특별대우한다’며 이를 선전자료로 써먹을 준비를 잔뜩하고 있었다. 우리의 애당초 판단은 계급 높은 장군은 전선에 나서거나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단 타기를 거부하고 다른 귀환 포로와 마찬가지로 앰뷸런스를 타겠다고 했을 때 장군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은 되살아났다.
매일 일어났던 또 다른 흥미로운 일은 북한 군인들이 북으로 향하면서 미군이 준 옷과 신발을 벗어던지는 것이었다. 미국에 저항을 표시하기 위함으로 북한 언론을 위해 의도적으로 행하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옷을 길에 집어던졌으며 1953년 여름 수개월간 길에서 썩어갔다. 보안이 잘 된 길이었으므로 그 누구도 옷을 주워서 민간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얼마나 낭비인가.
우리는 매일 400여명의 귀환포로를 받았다. 주 6일씩 5주일동안 이를 행했다. 모두 1만2,757명이 돌아왔는데 그중 3분의 2가 한국군이었고 3분의 1 조금 안되는 숫자가 미군이었으며 나머지는 유엔군이었다.
포로교환이 끝나고 평생 유대를 맺게 된 포로교환팀 멤버들과 작별을 나눈 후 각자 다른 길로 가게 됐다. 나는 ASCOM City로 배치됐다.
맺음말
우리 한국인들은 미군이 한국전에서 5만4,245명 전사, 10만3,234명 부상하고 8,177명이 실종된 것에 대해 미국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이 아직도 분단돼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며 그 분단이 미국의 결정에 의한 것임도 알아야 한다. 첫째, 미국의 결정에 의해 분단됐고 둘째, 성공의 모든 징조가 보이는데도 미국이 맥아더 장군의 압록강 북진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분단이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승만대통령이 휴전협정에 요구했던 영웅적인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1)통일한국을 보장하고 (2)북한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만 보내어주라는 요구였다. 이러한 요구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국을 위해 원하는 게 있다면 이를 이루기 위해 의지와 준비, 또한 싸울 각오가 있어야 함을 각성시켜주는 게 된다.
우리는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남에게 의지해왔다. 한국은 미국에,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에 의지했다. 이제는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충분한 파트너가 되도록 성숙해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 도구를 가졌으나 아직 일등 국가가 되는 강한 정신력이 결여돼있다.
나는 지난 10년간 한국 평통위원회의 위원이었다. 그 기간동안 긍정적으로 행해진 게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이 위원회는 반세기동안 존재해왔다. 이제 무언가를 생산해내든가 아니면 그만두든가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면 곧 이루어야 한다. 다음 한 두 세대가 지나면 우리 젊은 세대중에서 북한이 다른 나라가 아니고 우리 모두 한 나라의 일부분임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외치려면 다음 두가지 일을 꼭 해야 한다. 첫째, 우리의 나쁜 특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기 선전과 속임수에서 세계에서 으뜸간다. 둘째, 공동 목표를 향해 협동적하며 사심없이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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