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은 과연 통일이 되는 것일까.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자 북한을 방문했던 나는 김대중 대통령 방북후 마치 당장 내일이라도 통일이 될 듯 들떠 있는 요즘 한국의 분위기를 보면서 또한번 먼나라인 북한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1991년 가을 재미경제인 조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열흘간 북한에 머물다 온 적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후 두 나라는 우선 공연예술과 체육부문에서 조금씩 서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당시 내가 방문했던 북한의 종합영화촬영소가 기억에 떠올라 그 때 방문기를 다시 들춰보았다.
북한의 모든 것이 다 그렇듯 이 곳의 영화도 주체사상에서 시작돼 그 해석으로 끝난다. 다만 오락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영화의 본질이어서 재미있게 주체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다소 특이할 뿐이다. 호텔 방에 놓인 TV를 통해 본 북한 영화들은 대부분 영웅적 항일투쟁이나 인민을 위해 불굴의 의지로 간척사업을 수행하는 영웅적 동지들을 찬양하고 있었다.
북한 영화의 기본정신은 주체사상이라는 것은 당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예술처 지도원 리종덕(당시 35세)씨의 “순수 오락영화는 의의가 없다”는 말이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북한에서는 ‘왜놈을 박살내는’영화나 TV프로를 흔히 보게 되는데 이것은 김일성 주석의 구국 항일투쟁사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인 듯했다.
북한 최대 종합촬영소인 평양 근교의 조선예술영화촬영소는 1974년 건설된 전통과 규모를 자랑하는 대단위 촬영소이다. 대지가 100만평방미터에 야외촬영장 면적이 75만평방미터로 연간 30여편 예술영화(편당 제작비 30만~40만원)와 10여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우리를 안내했던 공훈배우 김선남(당시 39세)씨의 설명.
김정일이 영화광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로 김씨는 이 점을 암시나 하듯 “김정일 동지가 영화예술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그동안 이곳을 340여회나 방문했고 2,400여회에 걸쳐 지침을 내렸다”고 알려줬다.
촬영소의 야회 촬영장에는 ▲봉건시대 조선 거리 ▲일본 거리 ▲중국 거리 ▲구라파 거리 ▲남조선 대학 건물세트 등이 세워져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이었다. 가옥 세트의 특징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달리 외부만 그럴 듯하게 세워놓은 게 아니라 완전히 하나의 독립 건물로서 당장이라도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음식(녹음식)등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각종 작업실은 다소 엉성해 보였다.
5년제 영화대학을 나와 당시 배우경력 12년째인 김선남씨에 따르면 공훈배우(기량과 봉사도에 따라 공훈 및 인민배우 호칭이 붙는데 인민배우가 한 단계 높다)의 연간 출연편수는 역사물, 현실물, 계급투쟁물등 각종 장르의 영화 3-4편. 그는 “조선에서 예술가는 존경받는 직업”이라며 “특히 김정일 동지는 영화를 통해 인민을 교양할 수 있다는 사실(스탈린도 그랬다) 때문에 영화에 더 애착을 둔다”고 김정일의 영화 사랑을 강조했다. 아마도 북한에서 김정일의 이름이 김일성의 이름보다 더 많이 거론되는 곳은 이 촬영소 하나뿐인 듯했다.
당시 평양시내 대동문영화관이나 개선영화관에 나붙은 ‘님을 위한 교향시’ ‘임진왜란’ ‘붉은 기 아래’ 같은 간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한에서는 코미디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인민들이 외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적다는 게 북한 영화 관계자들의 말. 그러나 영화 관계자들은 참고용으로 외국영화도 1주 1회 정도 볼 수 있고(내용보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또 해외여행도 가끔 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린다고 했다.
당시 촬영소를 방문했을 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북한 영화인들의 신상옥씨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신상옥씨 사건에 관해 물었더니 조금 전의 친절했던 태도가 갑자기 표독스럽게 변하더니 일제히 신상옥씨를 비난하는 발언들을 했다. 그들은 “평양시내에 신필름 예술영화촬영소까지 따로 마련해 주고 그렇게 대접을 잘해 줬는데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며 “우리는 언젠가 그를 단죄할 것”이라고 입에서 불들을 토해냈다.
사상과 이념과 국적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나는 당시 만수대 예술단과 만경대학생 소년궁전 소속 예술소조원들의 노래와 춤과 연주를 보면서 그들이 북의 사람들이라는 생각 대신 그저 ‘내 나라 사람들이 참 잘들도 하는구나’하고 감격했었다. 그들의 재능과 인적 자원이 남한의 것과 합해져 통일 한국의 예술적 탁월성이 세상을 빛낼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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