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바그너를 매우 좋아하는 친구 C의 제의에 따라 지난 주말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가 공연하는 바그너의 마지막 악극 ‘파르지팔’(Parsifal·사진)을 감상하러 베이시티엘 다녀왔다. 때마침 지난 주말은 이 도시에서 국제적 동성애자 축제가 열려 시내 전체가 장바닥처럼 시끌시끌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적 동기가 짙은 오페라를 감상한다는 것이 아이로니컬하기까지 했다.
바그너통인 C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간단한 요기를 위해 공연장인 전쟁기념 오페라 하우스 앞의 인 앳 더 오페라 호텔내 오베이션 식당에 들렀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고문이다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데다가 길어서 만복으로 감상했다가는 졸기 십상이다.
수년전 애리조나 플랙스탭에서 링사이클을 통해 바그너의 경외스런 중압감을 경험한 나는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기 전 CD로 미리 ‘파르지팔’을 한번 듣고 자료도 들춰보면서 단단한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도 역시 바그너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식당서 마신 진 마티니 2잔의 취기가 뒤늦게 오르면서 나는 5시간짜리 ‘파르지팔’을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우리 앞에서 관람하던 한 관객이 2시간 가까이 진행된 1막 끝 무렵 졸도를 했다. 바그너 파워의 실증을 목격한 것이다.
바그너가 기독교적 구원을 찾았다는 이유 때문에 친구지간이었던 니이체로부터 비판을 받은 ‘파르지팔’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쓰인 성배를 지키는 기운 빠진 기사들과 예수의 허리를 찌른 창 그리고 성적으로 유혹적이나 치명적인 꽃의 처녀들 및 저주받은 여인과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입은 성배의식을 집행하는 기사와 이들 모두를 구원해 줄 ‘순진한 바보’ 파르지팔(예수)에 관한 영혼이 가득한 종교적인 이야기다. 고통의 초월과 육체적 사랑의 힘 그리고 선과 악 또 순수한 사랑과 연민과 죄와 공포로부터의 궁극적 구원을 이야기한 이 오페라는 내용이 너무 심오하면서 극적인 충격이나 기복이 모자라 도전의식을 갖고 감상해야 한다.
말년의 바그너가 자기 영혼의 구제를 기독교적인 것에서 찾은 음악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바그너의 절대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반유대주의자인 그의 유대교로부터 예수를 구출해 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오페라라는 비판도 받고 있지만 이런 것들을 떠나 드뷔시가 말했듯이 후광을 받은 듯한 광채 나는 관현악 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즐거운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가 런던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와 시카고 리릭 오페라와 공동으로 제작(니콜라우스 렌호프)한 3막짜리 ‘파르지팔’은 세트와 의상이 매우 현대적이었다. 돌들의 잔해가 널린 세트는 지구 종말 후 세상처럼 황량하고 기사들은 진시황 무덤에서 발굴된 테라코타 전사들 같았으며 또 파르지팔의 모양은 마치 사무라이를 닮았다. 거대한 뼈만 남은 골반 모양의 클링조르의 성에 사는 꽃의 처녀들은 옷소매를 나비처럼 너울거리며 춤을 추면서 기사들을 유혹했고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게 하는 영원한 삶의 저주를 받은 쿤드리는 거대한 곤충처럼 껍질을 깨고 나와 몸부림을 치면서 속죄하고 구원을 찾았다.
암포르타스역의 프란츠 그룬트헤버와 쿤드리역의 캐서린 말피티노 등 가수들의 음악성과 성량도 훌륭하고 풍부했는데 프로그램을 보니 한국계 바리톤 한규원이 4명의 기사의 종자 중에 포함돼 있다. 이 날의 지휘는 LA 오페라도 지휘한 도널드 러니클스가 맡았다. ‘파르지팔’은 1882년 8월29일 바이로이트에서 최초 16회 공연중 마지막 공연을 가졌는데 3막 마지막 부분을 직접 지휘해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은 바그너는 그로부터 6개월후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파르지팔’은 오늘 오후 7시와 7월2일 오후 1시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와 LA타임스 일요일자 캘린더 섹션을 들추니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를 지난 12회 시즌 동안 맡아오며 획기적인 작품 공연으로 이 오페라를 미 정상급 중 하나로 올려놓은 총감독 로프티 만수리(71)가 오페라를 떠난다는 글이 실려 있다.
바그너 오페라야 어차피 한번 들어서 될 것이 아니니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감상키로 하고 친구와 나는 토니 베넷이 ‘별이 있는 곳의 절반까지 오르네’라고 노래한 케이블카를 타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리전 오브 오너 미술관을 찾았다. 바람 부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의 상반신을 이 도시의 또다른 명물인 안개가 감싸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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