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7월이지 하고 달력을 쳐다보면 아직도 6월이다. ‘2000년 6월13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악수를 하다’- 이 순간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서 일까. 이후 북한이란 존재는 새삼 무겁게 정수리를 짓눌러 온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념이 끊이지 않는다.
연전 LA-서울-하얼빈을 잇는 24시간이 채 안되는 항공 여정에서 스쳐간 ‘20대 한인 여성들의 오버랩 된 모습이 그 상념의 단편이다. "첫 장소는 LA공항. 20대 초의 한 여성이 활짝 웃으며 친구로 보이는 미국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발랄한 옷차림에 활달한 표정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코리안-아메리칸 2세다. 두 번째 장소는 김포공항. 출영을 나온 한 20대 여성이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다. 조신스런 태도지만 조금도 딱딱하지 않다. 삶의 여유가 엿보인다. 그 표정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몇시간 후 하얼빈 공항. 일순간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카키색 투성이다. 텅빈 공항청사. 몇 안되는 출영객. 썰렁한 분위기다. 곧이어 눈에 들어온 조선족 여성은 LA, 서울서 스친 여성들과 같은 또래로 보인다. 이 여성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희미한 미소였다. 그러나 촌색시같은 수줍은 표정에는 열린 세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새 밀레니엄을 맞아 세계적 거대 담론의 화두는 ‘미국의 세기’였다. 20세기에 뒤이어 21세기도 과연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 하는 게 논의의 주제. 그 전망은 21세기 역시 미국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시대가 된다는 것으로 대체로 일치됐다. 그러나 단정적인 ‘미국의 세기’라는 말은 피햇다. 대신 나온 말이 ‘팍스 데모크리티카’와 ‘문화의 세기’ 등이다.
’팍스 데모크리티카’시대의 전망은 지난 20세기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 체제 확산의 시대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 일부 지역으로 국한됐던 민주주의 체제는 21세기 문턱에 들어선 현재 119개 국가에 전 세계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공산체제의 붕괴의 결과로 공산국가 몰락의 공백을 미국 주도의 세계자본주의가 메우면서 민주주의는 이제 세계화 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는 논리다. 민주주의 대세론은 이제 일종의 예정론으로까지 발전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가 된다는 전망의 중심도 여전히 미국이다. 인터넷 시대의 개막이 바로 미국문명이 세계지배를 강화한다는 의미다. 또 인터넷에 의한 세계화가 진행되면 세계인들은 두 개의 문명에 속한다는 진단이다. 즉 특정국가의 시민인 동시에 미국이 중심이 된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세계문명의 주민이 된다는 것이다. 북미, 서구, 일본, 호주, 그리고 한국등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시스템’에 편입된 국가의 시민들은 이미 특정국가의 시민인 동시에 ‘서방’으로 불리는 보편적 세계문명의 주민이 됐다는 지적이다.
21세기를 내다보는 양대 담론에는 그런데 북한이라는 존재는 없다. "세계의 민주화는 필연이고 정치 모델로서 사회주의는 죽었다. 북한은 더군다나 정상적 국가가 아니다. 이 비정상의 북한이 그나마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민주화, 신자본주의 물결에 편승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북한체제는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없다." "문화란 살아 있는 것, 변화하는 것이다. 문화는 새로운 것의 창조로 정의된다. 북한에는 현대적 의미의 문화가 없다. 단지 문화적 되풀이만 있을 뿐이다. 개방을 하면 위협받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권력이다."
2000년 6월13일, 14일, 그리고 15일. 평양서 방영된 TV화면은 여러 가지 모습의 김정일로 가득메워졌다. 여유 있는 태도, 위트가 넘치는 말솜씨, 그리고 환히 웃는 모습. 일종의 쇼크로까지 전해진 이 화면의 밑그림은 삶에 지친듯한 북한 인민의 닫혀진 모습이었다. 연도에 늘어선 북조선 여인들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그러나 피곤한 미소, 박제된 미소로 비쳐졌다. LA 공항에서, 김포공항에서, 또 하얼빈에서 스쳐간 조선족 여인의 미소도 분명 아니었다. 북조선 여인들이 티없는 웃음을 지을 때, 그 때에나 통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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