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년 만에 드러난 억울한 죽음, 진상조사는 언제쯤....
포성이 멎은지 반세기에 다가서고 남북정상회담의 화려한 뉴스가 지면을 덮어도 전쟁 당시 발생한 학살의 현장을 찾아 피맺힌 가슴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금년초 본보 보도로 50년만에 실체를 널리 드러낸 한국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대표적 현장인 대전시 동구 낭월동. 지난달 17일 이곳을 처음 찾은 피살자의 유족 수십 명은 한사람 분도 채 안 되는 신원미상의 출토 유골을 앞에 두고 부모형제일지도 모른다며 차례로술을 치고 울부짖었다.
지난 50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가족이 개전 초기 혼란에 빠져 있던 1950년 7월초 이곳에서 학살됐다는 사실을 본보 보도로 확인하고 제주도로부터 낭월동까지 찾아온 유족들은 "제 날짜에 제사나 지내게 정확한 처형일이나 알려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지난 2월 KBS-TV(제주)가 현지답사 취재를 하면서 포크레인을 가지고 현장 아무데나 한 삽을 뜨자 대뜸 유골이 나올 정도로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 이곳에서만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여명을 포함, 무수한 사람들이 학살됐기 때문이다. 심규상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기획위원은 "조사 결과 재소자·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 등 최소 3,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낭월동 3개 학살장에서 억울하게 숨진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와중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된 이들에게 조국은 죽어서도 편히 쉴 곳이 되지 못했다. 폐결핵 등에 특효라며 유골로 뼈기름이나 뼈가루를 만들어 파는 사람에게 마구잡이로 신체를 뜯기는 일이 20여 년이나 계속됐다. 유족 이도영 박사는 "경산 코발트탄광학살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뼈기름이나 뼈가루를 만들어 팔거나 의학이나 생물교재로 넘기기 위해 시신을 훔치고 금이빨 때문에 이빨을 뽑기도 하고….
도대체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몬도가네가 따로 없다"고 탄식한다. 진상규명에 앞장서던 유족 이원식(의사)·이복녕(농부)씨에게 사형이나 10년 징역형을 선고하는 등 한국정부가 줄곧 진상규명노력을 탄압하면서 진상을 은폐하거나 외면해 오는 틈을 비집고 발생했던 현실이다.
학살현장 일부가 콩·파·무우 따위를 키우는 텃밭으로 변한 낭월동에서는 현장확인을 위해 땅을 파보려는 사람과 주민 사이에 가슴 아픈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도록 보상해주면 땅을 파게 해주겠다"는 주민의 주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같은 승강이는 국민 누군가가 유골을 비료 삼아 자라는 이곳의 채소를 먹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안해도 이미 또 다른 비극의 현주소이다.
심규상 위원에 따르면 대전의 경우에는 본보 보도후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시민들의 노력이 주효해 전모가 대부분 밝혀졌으며 향토사학자인 이규희씨 등은 당시 처형을 집행했던 육군 연대의 부대명과 지휘관 이름까지 거명 하고 있으나 정부는 민원처리라는 수준에서 지난달 대전지방검찰청이 잠시 조사했을 뿐 금년 초 조사 의지를 표명한 이래 지금까지 아무런 공식적 움직임도 발표도 없다.
이와 관련,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학살은 김창룡이 이끌던 육본 정보국 제4과(CIC: 방첩대)가 한 것이라고 육본이 대구로 옮겨졌을 때 들었다"고 지난 1월24일 자민련 당사에서 이도영 박사에게 밝혀 육본 정보국이 민간인 집단학살을 주도했음(본보 1월19일자 보도)을확인했다. 김 명예총재는 전쟁초기 육본 정보국 북한반장(중위)으로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월초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노근리 사태 진상조사 외부전문가 자문단을 청와대에서 접견한 자리에서 "(대전학살 등에 대해) 곧 진상조사를 지시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를 전후해 국방부도 진상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으며 해군본부도포항의 함상 처형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의 진상을 조사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대전에서-미주본사 한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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