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끝난 40년대 후반 미국인들의 관심은‘안정’이었다. 내일을 알수 없던 불안과 긴장에서 풀려나자 뭔가 확실한 것, 뭔가 안정된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결혼 붐과 베이비 붐을 이뤘다. 예쁜 아내·멋진 남편 얻어 아담한 집에서 아들딸 낳고 잘 사는 것 - 그것이 젊은이들의 소망이 되었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진 것은 미국에서 한창 평화롭고 아늑한 행복에 대한 욕구가 높을 때였다. 사우스캐롤라이너에 살던 준이라는 아가씨가 기대하던 삶도 그런 것이었다.
“우리의 꿈은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갖고 예쁜 아이를 갖는 것이었어요. 그는 나를 닮은 여자아이를 원했고 나는 그를 닮은 사내아이를 원했지요”
60대에 들어선 지금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사람, ‘그’의 이름은 로버트 얼 레게스였다. 준이 한살 위의 밥(로버트의 애칭)을 만난 것은 17살때였다. 신문배달을 하던 밥에게 신문대금을 주면서 알게돼 2년간 데이트를 하다가 1953년 1월 결혼했다. 그러나 군복무 중이던 밥은 미처 신혼을 즐길 틈도 없이 한국으로 파병되었다.
“1년 안에 돌아올게”대수롭지 않게 남편은 떠났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휴전을 20일도 채 안남긴 7월초 밥은 이북의 석계 전투에서 전사했다.
“처음에는 실종 통지가 왔어요. 생사를 알수 없어 6개월간 가슴을 조렸는 데 결국 돌아온 것은 그의 주검이었어요. 그를 따라 죽으려고 했지요. 하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더군요”
남편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준은 2년후 재혼을 결심했다.
“사랑 때문이 아니었어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밥이라고 이름 지으면 그 아이를 보며 그를 보는 듯 살수 있을 것 같았어요”
첫 아이로 딸이 태어나자 밥(로버트 얼)의 이름을 따서‘로버타 얼린’이라고 지었고, 둘째로 아들이 태어나자 밥이 끔찍이 사랑하던 동생‘브루스’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두번째 남편의 이해심이 특별했고, 3남매가 훌륭하게 성장해 돌아보면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도 내 마음은 늘 밥의 무덤가에 가 있어요. 그는 나의 진정한 사랑이었어요”
정동규박사가 쓴‘3일의 약속’을 읽고 수천명의 미국인들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을 때 나는 좀 의아했다. 아무리 그의 인생여정이 극적이고 파란만장했다고 해도 무명의 한국인 이야기에 미국인들이 그렇게 감동을 받을 이유가 있을까. 의문은 얼마 전 정박사의 진료실을 방문하면서 풀렸다. 무더기로 쌓여있는 각양각색 필체의 편지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도 살펴주지 않던 상처를 정박사의 상처에 비벼 위안받고 싶은 마음들이 거기에 담겨있었다. 준의 편지도 그 중의 하나였다.
미국을 초강의 위치로 올려놓은 2차대전, 그리고 미국이 패배의 쓴잔을 맛본 베트남전의 사이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사건이었다. 6.25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은 그것이 억울했다. 그 전쟁으로 사랑하는 남편, 아들을 잃고, 포로수용소 생활 후유증으로 사후충격정신분열증 같은 고통에서 이제껏 벗어나지 못하는 등 생의 흐름이 뒤바뀌는 엄청난 비극들을 겪었는 데 아무도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의 슬픈 이면은 미국정부나 국민들로부터 관심을 못 받는 것이다”“한국전 참전 이야기를 하면 동료들은‘정말 그런 전쟁이 있었어?’하는 반응이다”고 참전군인들은 편지에 섭섭한 마음을 적었다. 21살에 남편이 전사한 한 부인은“나와 우리 아기가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빠를 남의 나라 땅에서 잃었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란 말인가”라고 수십년 한의 응어리를 호소하기도 했다. 편지들은 6.25로 인해 우리가 어머니로, 아내로, 혹은 형제로 겪었던 갖가지 유사한 비극들을 담고 있었다.
미국의 6.25 참전은 정치적 이념적 이해가 깔린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전쟁으로 인해 젊디젊은 미국의 청년들과 그 가족들이 개별적으로 겪어야 했던 희생이 가벼운 것일 수는 없다. 전쟁 3년동안 미군 전사자는 5만4,000여명, 부상자는 10만3,000여명, 그리고 8,100여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하면 미국에서 의외로 많은사람들이 6.25의 아픔을 안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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