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초대석>
▶ 인천상륙작전 참가 미 예비역해병대위 도널드 멜맨
<만남사람 박덕만 편집위원>
예비역 해병대위 도널드 멜맨(71)은 한국전 참전용사다. 한국전이 발발했을 때 21세 대학생으로 30발의 사격훈련을 받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서울을 탈환한뒤 다시 배편으로 원산에 상륙, 북진을 했고 중공군 개입으로 흥남으로 후퇴, 배편으로 철수하기까지 악명높은 ‘초신 전투’등 한국전의 치열했던 전투는 대부분 참가했다.
그과정에 전공을 인정받아 처음 일등병이었던 계급이 2년만에 중위가 됐다. 후퇴작전 때 무리한 행군으로 발목뼈가 빠져나와 보기 흉한 불구가 됐다. 한반도의 수호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쳤기에 지난50년동안 한국에 대한 관심을 잃어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날때마다 열심히 신문기사를 읽었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투고도 해왔다. LA인근 스튜디오시티의 자택에서 멜맨대위를 만나 ‘한편으로 6.25 50주년 행사에 분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통일의 기대에 부풀어 있는 한국인들’을 지켜보는 느낌을 들어봤다.
-한국전 발발 50주년을 맞았다. 그중에서도 1950년 9월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연합군이 전쟁국면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준 중요한 작전이었다. 귀하는 미해병 1사단의 일원으로 작전의 선봉에 섰었다. 그당시 작전상황을 설명해달라.
▲USC 재학중 소집됐다. 캠프 펜들턴에서 단 30발의 사격연습을 하고 수송선에 몸을 실었는데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 나선다는 긍지를 느꼈다. 600명이 적정선인 수송선 ‘머린 피닉스’호에 4,200명이 타고 LA항을 출발, 13일만에 일본의 코베항에 닿았다. 선실이 비좁아 16층으로 침대를 설치했는데 위쪽에서 자던 사람은 배멀미로 고생이 심했다. 코베에서 다시 상륙정(LST)로 갈아타고 사흘만에 인천에 도착했다. 해가 질무렵이었는데 간만 때문에 연기가 불가능해 다소 무리하게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서울을 수복하기 까지는 얼마나 걸렸는가. 서울탈환 작전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가.
▲인천에 상륙한지 15~20일만이었던 것 같다. 국지적인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는데도 맥아더사령관과 이승만대통령이 함께 수복된 서울에 올라와 우리 병사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당시 이승만박사가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 기억 나는데 일제때 고문을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들었다.
-서울 수복후 육로로 북진했는가. 그당시 애로사항은 무엇이었나.
▲아니다. 다시 LST를 타고 원산으로 갔다. 2주일간 LST를 타느라 배멀미가 심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날씨는 추워지는데 하복차림으로 전투를 계속해야 했다는 것이다. 전투보다 동상으로 쓰러지는 병사가 많았다. 증공군이 개입하면서 후퇴가 시작됐다. 중공군이 후퇴하는 미군을 우회해서 앞질러 포위하려고 하는 바람에 69시간동안 잠도 못자고 식사도 못한채 계속 행군을 했다. 캔음식은 얼어붙어 먹지 못하고 캔디나 빠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한참 캔디를 빨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내려다 보니 온몸이 동상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중공군 한명이 나를 부러운 눈길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노근리 사건을 들은적이 있나. 미군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비극이겠지만 그당시 상황이 이해는 간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일본 주둔군으로 테니스 라켓이나 골프채를 휘두르며 즐기고 있던 육군 병사들이 부랴부랴 투입됐는데 전투를 수행할 준비가 전혀 안돼 있었다. 적이 누군지 아군이 누군지도 구별을 할수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쏘는 수밖에 없었다. 그과정에서 생긴 비극이다.
또한 인민군과 중공군은 무고한 민간인을 방탄벽으로 이용했다. 공산주의자들이란 인명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는 무리들이다. 피난민들을 몰아세워 앞으로 나가게 해놓고 그 사이사이에 숨어서 우리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우리도 별수없이 응사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희생도 불가피했다. 심지어 5살바기 어린이를 시켜 수류탄을 투척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미군은 피아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병사들이나 부대설비에 민간인의 무단 접근을 금지시켰고 불응하면 부득이 발포해야만 했다.
-한국전에 참전하는 동안 그밖에도 기억에 남는 일이 많을 것 같다.
▲두가지 끔찍한 일을 목격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 교외의 한 언덕지대의 구덩이에서 아기를 업은채로 아기들과 함께 대검에 찔려 집단살해 당한 젊은 부녀자들의 시체 30여구를 발견했다. 물론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저지른 만행이었다.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잔인한 무리들과 어떻게 평화를 논하는지 모르겠다.
다음은 중공군개입으로 후퇴할 때였다. 해병은 항상 가장 앞장서서 공격하고 가장 뒤에서 후퇴한다. 전사자 수송도 우리 해병들의 몫이었는데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시체를 후송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영하 25도의 혹한속에 얼어붙은 땅을 파고 묻어 줄 수 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20~150구의 아군전사자의 시체를 불도저로 눈과 함께 밀어 집단매장하고 말았던 일이 아직도 가슴에 걸린다.
-지난주 평양에서 남한의 김대중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국방위원장간에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렸다. 남북한이 평화속에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내생각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그들은 결코 펑화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을 과소평가하면 안된다. 평화는 상호호혜주의에 입각해 이루어져야만 하는데 북한은 받기만하고 주는 것이 없다. 핵미사일을 포기하길 하는가, 병력을 줄이려고 하는가 말이다. 수많은 국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100만명의 군사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과연 평화를 원하는 자들이 취할 자세이겠는가. 김정일도 그아버지 김일성의 뒤를 이은 독재자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한국 대학생들이 그를 찬양한다고 들었는데 큰일 난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이번 LA한국총영사 관저에서 열리는 한국전 50주년 기념만찬에 초대장을 받고 이를 거절하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안다.
▲나는 내 목숨을 걸고 지킨 한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선진공업국으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전해들으면서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웠던 사람이다. 한국정부에서 해마다 참전용사들을 초청하길래 세차례나 신청서를 보냈는데 한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 나로서는 충분히 초청받을 자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전때는 한국에 가보지도 않았던 친구들도 초청받는데 나는 제외된다는 것이 섭섭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미국이 프랑스와 영국등을 위해서도 싸웠지만 어느나라 영사관도 고맙다고 파티를 열어주는 곳은 없다. 한국인들은 고마움을 표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언젠가 한국에 가서 발전상을 꼭 한번 직접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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