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2년 11월부터 1953년 11월까지 미 해병으로 한국에서 복무했다. 1953년 7월의 휴전협정후에 있었던 포로교환동안 판문점 포로접수소에서 통역책임자로 일한 후 인천 동쪽의 부평에 있던 ASCOM(육군 보급창)에 배치됐다.
여기 쓰고자 하는 것은 군인이 아닌 한국의 일반 민간인들과의 첫경험으로 이를 통해 나는 한국인에 대한 자세한 첫 인상을 새겼던 것이다.
해병대 규정상 해병은 전장에서 단지 1년만 체류할 수 있으므로 내가 한국에 있을 기간도 몇 달 남지 않았기에 나는 남은 기간을 ASCOM에서 헌병으로 복무하게 됐다.
ASCOM 기지에는 많은 한국 민간인들이 이발사, 세탁부, 잡일꾼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개인적인 일을 도와준 대가로 이들에게 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군화폐 대신 담배를 주기 원해 PX에서 담배를 사다주었다. 담배 10갑도 1달러로 돈 1달러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담배를 원하는 것은 군기지 밖에 나가 암시장에서 3달러에 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기지내에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소지하는 것은 허용되었으나 기지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은 불법이었고 암시장에 파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헌병으로서의 나는 기지 출입문에서 당번을 섰다. 출입문 당번 스케줄은 공개되지 않았고 아무도, 특히 한인 민간인들이 이를 알아서는 아니되었다. 그러나 물론 한인들은 정보를 빼내었다. 실제로 그들은 내 당번 스케줄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내가 출입문을 지키는 날은 내 한인 친구들이 - 그들 모두가 마치 내 친구인듯했다 - 가진 것 무엇이든 기지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는 날이기도 했다.
문은 양측으로 되어 있어 한쪽은 들어오는 차를, 다른 쪽은 나가는 차들을 점검했다. 보행자들은 어느 쪽을 이용해도 무방했다. 두명의 해병이 문을 지키는데 이들 임무 중의 하나는 한인들이 아무것도 불법으로 기지바깥에 가지고 나가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더듬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일과가 끝날 무렵이면 한인들이 나가면서 점검받기 위해 문에 줄지어 늘어섰다. 그 모두가 기지밖으로 물건을 가지고 나가지는 않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건을 가지고 나가지 않는 사람들조차 다른 쪽에 줄서지 않고 내 쪽에 줄서는 것이었다. 내 동료들은 항상 이를 두고 농담했으나 상관에게 고해바치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짚차를 타고 기지안으로 들어오던 장교 한사람이 이를 주목하고 내가 한인들에게 뭐든지 기지밖으로 훔쳐나가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나는 헌병사령관에게 소환돼 해명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나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이는 문화적 이유에 기인한 것으로 한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 건드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내 설명을 그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한인들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물건을 가지고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편에 줄서도록 하여 서로 돕기를 희망했었다.
내가 한인들에게 물건을 가져나가도록 허용한 것은 그들이 나와 같은 한인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해서 얻은 것이므로 군당국이 정한 규정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게 내 마음이었다.
어느날 한 한인 친구가 자신의 친구 할머니가 당한 일을 내게 호소했다. 그는 내가 그 일을 아는 것은 무방하나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그 친구와 할머니가 나중에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송유관에 아주 작은 구멍이 있음이 발견돼 그 할머니가 인내를 가지고 이를 한방울씩 모았다는 것이다. 이곳의 경관 한 명이 이를 알아차리고 할머니에게서 기름을 빼앗은 후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 발설하면 경찰에 알리겠노라고 협박했다.
나는 경관의 집을 찾아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기름 한통이 그집 마당에 숨겨져있는게 아닌가. 나의 서툰 한국말과 그의 서툰 영어를 주고 받으며 그에게 기름을 할머니에게 돌려주라고 말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때려눕혔다. 그는 나보다 몸집이 컸다. 그가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손에 헌병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마침내 기름을 돌려주겠노라 말했다. 나는 귀추를 주목해보았는데 내가 아는 한 할머니와 가족에 대한 보복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내가 그 할머니를 본적은 결코 없었다.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도록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이 이들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가라고 내가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군기지 취사병이 인근 농부에게 부탁해 우리들에게 생달걀을 공급하게 했다. 해병들이 싫어하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달걀가루였다. 우리에게 매일 신선한 달걀이 공급됐으므로 여러 톤의 달걀 가루가 취사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당시 부평에는 고아원이 많았으며 그들은 필요한 게 많았다. 우리 지역 헌병사령관의 관대함으로 나는 달걀가루를 고아원에 배급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미국인들이 근본적으로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며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한 남을 도우려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의 모든 것이 나무틀안에 담겨져 한국으로 수송돼왔다. 그 안의 물건이 꺼내어지고 나무틀이 모아지면 일주일에 한 번씩 구내에서 불태워졌다.
그 나무들이 대부분 튼튼하고 깨끗했으므로 없애버리는게 아까워보였다. 다시금 헌병사령관의 박애에 힘입어 나는 이를 마을에 나누어주었다. 그는 처분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나무를 싣고나갈 트럭까지 제공해주었다.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혁신적인가를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나무로 개인용품뿐 아니라 팔 수 있는 물건도 만들었다.
그들은 감사의 뜻으로 헌병사령관에게 지팡이 10개를 선사했는데 겉에 가죽이 입혀졌고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그는 이를 장교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임시 상등병이었던 내게도 한 개 주었다. 당시 그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영예의 표시였다.
근본적으로 비번 시간에는 할 일이 별로 없어서 기지내 주점에서 맥주 마시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신 맥주 덕택에 좋은 일을 하게 됐다.
그때 맥주는 한 캔에 5센트였다. 그 가격으로도 그들은 이익이 많이 남았으므로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에는 공짜 맥주가 주어졌다. 수많은 맥주캔이 쌓여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캔은 아주 튼튼한 강철 캔이었다.
부평 간선도로에는 교회가 있었는데 전쟁통에 초라한 모습이 됐다. 포총과 화재 등으로 구멍나 있었다. 우리는 맥주캔을 잘라서 편편하게 한 다음 교회건물 겉벽을 모두 덮었다. 맥주회사 상표가 인쇄된 부분이 안쪽으로 가게 하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금속면이 겉으로 가게 해 적어도 우리에게는 꽤 보기에 좋았다.
일부 사람들은 맥주캔으로 어떻게 예배당을 덮을 수 있는가라고 탐탁치않아 했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건물을 비바람에 견디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거기에는 목사의 축복이 있었고 더 좋은 해결책이 있을 때까지의 임시 방편이었다. 그것에 비록 고딕 건물같은 모양새는 없었으나 실용적이었으며 나는 일을 해냈고 목사는 감사해했다.
어느날 늦게 나는 헌병사령관실에 호출돼 한국인 6명의 미국정부에 대한 요구를 통역하게 됐다. 이들은 너무 큰소리로 빠르게 말해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이들을 진정시킨 후 점잖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게 한 후 마침내 소가 지뢰를 밟고 죽은 것을 알게 됐다. 이들은 지뢰가 미국에 속한 것이므로 미국인이 마땅히 죽은 소값을 변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령이었던 헌병사령관은 매우 침착한 사람이었고 경험 없는 풋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지뢰가 러시아산으로 북한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묻어놓았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전형적인 교착상태였다. 지뢰가 산산조각났으므로 증명할만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서로 목청돋우는 식이 되고 말았다. 결국 한인들이 이겼다.
사령관은 그들이 얼마를 요구하는지 알아보라고 내게 요청했다. 그 금액이 얼만지 지금은 잊어버렸으나 하여튼 상당한 액수였다. 사령관은 팔짱을 끼고 최대한 거칠게 “제기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이곳에서 나가라고 해.”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연극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이기게 해 준 것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한국인들이 전쟁이 끝난 후 세계에서 이루어낼 성공을 미리 본 셈이었다. 이것은 내게 매우 긍정적인 경험이었다.
얼마지 않아, 1953년 11월, 미국에 돌아와 학교로 돌아가면서 전쟁은 내게서 끝났다. G.I. Bill이 제공하는 베네핏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가 대학을 마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민간인 생활에서의 목표를 2-3년간 유보했으나 미해병대에서의 멋진 여행과 한국 보통사람들과의 훌륭한 경험을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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