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신약개발의 성공 조건은
▶ AI 활용 거의 초기단계에 머물러
▶ 시험 설계·데이터 학습 문제 직면
▶ 업체들 자체플랫폼 구축·내부실험
▶ 한국도 K멜로디 프로젝트 추진
영국 신약개발사 ‘익센시아’는 지난 2020년 인공지능(AI)으로 항암제를 설계해 임상시험에 진입했다. 챗GPT 공개보다 2년이나 앞서서 AI를 이용한 신약개발에 선구적으로 나섰던 이 회사는 그러나 3년 만인 2023년 개발을 중단했다. AI로 설계한 항암제 후보물질이 임상시험 1·2상에서 적정 약효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익센시아는 자금난에 시달리다 경쟁사인 미국의 리커전 파마슈티컬스에 지난해 8월 6억8,800만 달러(약 9,900억 원)에 매각됐다. AI 신약개발을 선도했을 당시 기업가치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연구개발에 AI를 도입하는 시도가 가파르게 늘면서 신약개발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을 거란 예상이 많다. 하지만 AI 기반 신약 후보물질의 임상 실패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AI가 곧 신약 상용화 성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AI가 당장이라도 세상에 없던 약을 내놓을 거란 기대는 상당 부분 과장됐다거나 심지어 허상일지 모른다는 목소리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AI를 기반으로 시도된 신약 임상시험은 2020년 17건에서 2023년 67건으로 약 4배 늘었다. AI에 대한 기대가 확대됨에 따라 기업들의 도전도, 투자자들의 관심도 점점 커지는 중이다. 일라이릴리, 사노피, 머크 등 글로벌 빅파마들은 AI 신약개발사와 공동연구에 나서거나 기술이전 계약을 활발히 맺어왔다. AI 산업을 이끄는 정보기술(IT) 기업들 역시 신약개발을 새로운 시장으로 보고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 같은 기대는 단백질 구조 분석 플랫폼 ‘알파폴드’로 구글 딥마인드의 과학자들이 2024년 노벨화학상을 받으며 절정에 오른 분위기다. 화학물질의 구조와 기능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설계해 약효와 안전성을 갖춘 후보물질을 콕 집어내는 과정은 신약개발의 핵심이다. 그런데 워낙 고난도라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이를 AI가 빠르고 정확하게 대신해 시행착오를 대폭 줄여준다면 신약개발 성공률은 크게 올라갈 수 있다. 이에 구글의 ‘아이소모픽랩스’, 마이크로소프트의 ‘에보디프’, 메타의 ‘ESM 폴드’, 엔비디아의 ‘바이오네모’ 등 빅테크마다 신약 후보물질을 찾고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 플랫폼을 앞다퉈 내놓았다.
하지만 최근 제약·바이오 업계에선 당초 장밋빛 기대와 달리 AI 신약개발이 예상보다 쉽지 않다는 공감대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 익센시아에 이어 영국 AI 신약개발사 ‘베네볼런트AI’도 2023년 AI 플랫폼으로 발굴한 아토피 치료제 후보물질을 신약으로 개발하려다 임상시험 도중 실패했다. 이 회사는 곧바로 직원 30%를 감원하고 미국 사무소를 폐쇄하는 등 크게 휘청였다. 국내 업계에서도 일부 기업들이 AI를 적용한 신약개발을 시도하다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패의 주된 이유는 AI가 전체 신약개발 과정 중 임상 이전 단계에 주로 활용돼서다. ‘후보물질과 표적 발굴→구조 분석→동물실험과 안전성 확인→임상시험과 효능 확인→보건당국 허가’로 이어지는 전체 과정이 15년이라면, 현재 AI 활용은 초기 5~6년에 해당하는 단계에 집중돼 있다. 후보물질 탐색과 임상 전 단계를 대폭 단축한다 해도 나머지 과정은 그대로 남는다는 얘기다. 또 강력한 컴퓨팅 인프라를 공급해 초고도 AI를 만들었더라도 초기 아이디어가 잘못 설정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도 못한다.
신약개발용 AI는 약물과 관련된 데이터를 인식하고 학습해야 한다. 이 데이터를 어떻게 만들고 학습시키는지는 결국 AI가 아닌 사람에게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유전물질의 구성요소나 화합물의 구조를 어떤 맥락과 패턴으로 학습시키냐에 따라 AI 모델들이 같은 병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신약 후보물질들을 답으로 내놓을 수 있다. 국내 AI 신약개발 기업 온코크로스의 김이랑 대표는 “연구자 개인이나 회사의 노하우로 데이터를 어떻게 가공하고 전처리하느냐에 따라 AI 활용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가 신약개발 초기 단계에 활용이 집중된 건 중·후반 단계 활용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가 부족한 탓도 있다. 신약개발 후반부에서 중요한 데이터는 환자들의 임상 수치를 디지털화한 정보다. 워낙 민감한 개인 의료정보라 활용이 쉽지 않은 것이다. 신현진 목암생명과학연구소 소장은 “우선은 데이터가 많은 신약개발 앞 단계부터 AI 활용을 시작했지만, 점차 전 단계로 확산할 것”이라며 “AI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매몰되지 말고 데이터 확대와 효율성 향상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내다봤다.
결국 AI 신약개발의 승부는 개인 의료정보나 약물 특허정보가 담긴 데이터를 유출 걱정 없이 얼마나 충분히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주요 AI 신약개발 기업들은 자체 AI 플랫폼을 구축해 내부 실험을 하며 성능을 강화해왔다. 예를 들어 미국 AI 신약개발사 터레이 테라퓨틱스는 축구장 3분의 2 크기만 한 실험실을 전부 디지털화해 매일 50테라바이트의 데이터가 자동으로 쌓이게 만들었다. 또한 리커전 파마슈티컬스가 엔비디아로부터 5,000억 달러를 투자받고 엔비디아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H100을 무려 504장 투입해 ‘바이오하이브-2’ 시스템을 개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시스템은 현미경으로 얻은 세포 이미지 수십 억개를 AI에 학습시키고, 약물 투입 후의 미세한 반응을 탐지해 시각 데이터로 쌓고 있다. 리커전은 이 시스템으로 일주일에 200만 건 이상 실험을 하며 신약 발굴 속도와 확률을 높이는 중이다.
지난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국제 뇌졸중 콘퍼런스에 참가한 리커전은 바이오하이브-2 시스템을 이용해 만든 신약이 뇌혈관 기형 환자의 뇌 병변을 절반 감소시켰다는 임상 2상 결과를 공개했다. 앞서 올 초 미국의 또 다른 AI 신약개발사 ‘인실리코 메디슨’은 특발성 폐섬유증 치료제의 효과를 입증하는 임상 2상 결과를 내놓았다. 이 치료제는 AI를 활용한 덕분에 족히 6개월은 더 소요될 물질 발굴에 단 46일이 걸렸다. 리커전과 인실리코 메디슨은 ‘최초의 AI 발굴 신약’ 타이틀을 놓고 팽팽히 경쟁하는 중이다.
지난 2019~22년 유럽연합(EU)은 로슈, 바이엘 등 17개 빅파마와 AI 기업들이 신약개발 데이터를 공유해 학습을 가속화하는 ‘멜로디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우리나라가 작년에 착수한 K멜로디 프로젝트는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김화종 K멜로디 사업단장(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신약융합연구원장)은 “글로벌 빅파마와 빅테크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AI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며 “정부기관과 제약사 간 표준화를 통해 데이터 절대량 부족을 해결한다면 국내 신약개발에도 혁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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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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