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우스개 소리로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한다. 이제 노년은 그냥 흘려 보내기에 너무 긴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긴 노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우편함을 열어보면 은퇴 자금 플랜 세미나 초대장이 고급 스테이크 레스토랑 티켓과 함께 한달에 한번 꼴로 배달되고 있다. YouTube를 접속하면 중간 중간 “은퇴 자금이 충분해야 노후가 행복하다”며 보험을 들라는 광고로 요란하다. 돈이 있다고 노후에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광고에 솔깃하며 다들 돈 걱정만 하며 늙어가는 것 같다.
몇 년 전 환갑이라는 말도 안 되는 나이를 지나고 나니 올해 메디케어 가입 의무 나이가 훌쩍 되어 버렸다. 우리 부모 세대는 60세가 되면 사회 일선에서 물러나 회갑 잔치를 하고 ‘고령자’ 라 불리는 나이였지만 이제 스스로 노인이라 생각하는 60대는 없다. 식생활 개선과 의학 기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은 획기적으로 늘었고 100세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 날이 길어지면서 오늘날 60대는 은퇴로 인한 해방감과 남은 인생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는 나이가 됐다.
그래서 은퇴 시기를 놓고 고민이 깊어 졌다. 환갑을 맞이하던 날, 아! 이제는 쉴 수 있겠구나, 이제 더는 남의 말을 안 들어도 되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며, 좋아하는 일을 찾고 인생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기가 성큼 다가옴을 직감하며 설레었다. 그동안 아내의 남편으로 자식의 부모로서가 아닌, 진짜 의미로 나만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를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올시다’ 경고음을 내며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은퇴 시기를 67세에서 70세로 다시 수정했다. 그러나 이 계획도 해가 갈수록 은퇴 후 30년 동안 일하지 않고 놀 수 있을까? 차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70세에 진짜 은퇴해도 될까? 신체 건강은 젊은데 일손을 놓아도 되는 것인지? 은퇴 자금은 충분한 것인지? 늙으면 자식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로 유지하는 게 좋을까? 중병에 걸리지 않아도 거동이 힘들어지면 가기 싫어도 비싼 돈 내는 요양원에 가야 할 텐데?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해 보였다.
짧은 인생을 살다 느닷없이 돌아가신 우리 부모 세대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쓸쓸하고 고독한 노후를 보내다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기간이 평균 75세로 그리 길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00세를 살 수 있다는 우리 세대는 노후 자금이 충분하지 않으면 부모 세대보다 두·세배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
작년에 한국 방문 길에 잠깐 시간을 내어 만난 죽마고우들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 친구는 50대 중반, 또 한 친구는 60세 초반에 제도적으로 배제되어 은퇴를 강요당했고 사회에서 역할을 찾을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다행히 한 친구 K는 50대 중반에 KT 희망 퇴직 후 헤드 헌터 컨설팅 회사에 재 취업하여 올해 은퇴를 앞두고 있고 계속해서 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여 쌓아온 IT 지식과 정보들을 사회에 되돌려 주는 일을 이어 나가겠다고 했다. 또 한 친구 K는 여수 시청 재무국장을 마지막으로 61세에 은퇴 후 3년을 여행하며 놀고 먹는 것이 지겨워 2년전 농업재해보험의 국가전문자격을 취득하여 손해 평가사로 전국 재해 현장을 찾아 어려움에 처한 피해자들을 돕는 일에서 공무원 생활에서 경험하지 못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남성 9년, 여성 12년. 노인이 질병이나 인지장애로 몸져 눕거나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는 평균 기간이다.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사실이 알려주는 정답은 역시 하나이다. 70세 은퇴 이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작은 수입일지라도 완전히 일손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돈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늙어가는 부모 세대를 내 기억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이다.
시간의 흐름은 부인하기 어렵다. 늙어가는 것이 결코 슬픈 일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사람 사귀는 게 점점 귀찮아져 만남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혼자라는 것은 외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고독의 시간이며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노후의 특권이다. 한 해 한 해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것을 찾아가는 길은 노후를 잘 보내는 최대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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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국 정치 철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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