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이 재해에 대하는 방법
▶ 재난 대비 교육훈련 철저히 실천
▶ 집집마다 비상 소화기 무상 교체
▶ 피난 경로 확인 등 ‘시스템 체감’
▶ 일, 재난 상황 극복 해왔지만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처럼 폭력·혐오 기제로 작용할 수도
일본은 세계에서 지진이 가장 자주 발생하는 나라 중 하나다. 실제로 소규모 지진은 거의 매일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규모 7 이상의 강진도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초래했다. 얼마 전에는 일본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거대지진의 발생을 주의하라’라는 재해 정보를 발령하기도 했다. 비록 이 ‘거대지진 주의’는 일주일 만에 공식적으로 해제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지진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가신 것은 아니다.
특히 올여름에는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무시무시한 폭염이 일본 열도를 덮쳤다. 한국의 여름도 무덥기로 악명이 높지만,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일본의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 비할 바는 아니다. 지난해에 온열질환으로 인한 사망자가 처음으로 1,000명을 넘었는데, 올해에는 그 기록을 가뿐히 갱신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사상 최강 위력으로 평가된 태풍이 이례적으로 느린 속도로 일본 열도를 훑고 지나갔다. 일본이 ‘재해대국’임을 다시금 실감했던 여름이었다.
일본 사회는 빈번한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재난 대비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든가, 학교나 회사에서 재난 대응 프로토콜을 마련하고 정기적으로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기본이다. 내진 설계와 관련된 건축 법규는 매우 엄격하며, 방재 댐이나 쓰나미 방벽 등의 인프라도 철저하게 관리된다. 재난이 발생하면 NHK 같은 공영방송이 즉각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긴급 재해 뉴스를 편성한다. 지자체는 방재 요령과 피난 지도를 정리한 깔끔한 방재 책자를 만들어 배포한다. 통신망이나 주요 인터넷 플랫폼에서도 실시간 정보 공유와 재해 지역 주민의 생사 확인이 가능하도록 재난용 통신 채널을 가동한다.
일본 시민들도 대부분 각자의 대비책을 갖추고 생활한다. 전기나 수도 같은 필수 인프라가 끊길 상황에 대비해 비상식량이나 휴대용 발전기를 사두기도 한다. 나도 일본에 살았을 때는 큰 지진이나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근무지나 주거지 인근의 대피 구역을 주지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집집마다 비상용 소형 소화기가 배치돼 있었는데, 몇 년에 한 번씩 이 소화기를 신품으로 무상 교체해 줬다. 안전 요원이 종종 집을 방문해 베란다에 마련된 비상 피난 경로가 제대로 확보돼 있는지도 확인해 줬기 때문에 퍽 안심이 됐다. 사실 이런 구체적인 방재 방법은 한국에서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이야기다. 다만 일본에서는 개인, 조직, 정부 등 다양한 차원에서 이런 대비책들을 ‘진지하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점에서 한국과 상당한 차이를 느꼈다.
지난달에 ‘거대지진 주의’라는 이례적인 재해 정보가 발령된 뒤, 일본인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불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딱히 피할 방법도 없으니 어쩌겠느냐”는 정도였다. 걱정하는 쪽이 무안할 정도로 담담한 답변이었다. 자포자기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대규모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큰 자연재해를 실제로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면,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맞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 나 역시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경험한 뒤에는 이런 마음가짐을 이해하게 됐다.
큰 지진을 한 차례 경험한 이후에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에는 반드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작은 원칙을 지키게 됐다. 뜻하지 않게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깨진 유리에 발을 다치지 않고 대피할 수 있도록 침대 옆에 신발을 놓고 잔다”는 지인도 있었다. 이런 소소한 대비책들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재해대국’의 주민들이 일상 속에서 불안을 이겨내도록 돕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철저한 대비책도 거대한 지진이나 유례없는 기상이변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때가 적지 않다. 현대적인 재난 대응 시스템이 구축된 후에도, 1995년 한신대지진 때 6,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불과 10여 년 전에 일어난 2011년 동일본대지진에서는 지진과 지진해일(쓰나미)로 1만5,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치명적인 방사능 사고가 발생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난 관리 시스템이라도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한편 일본 사회는 평소에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강한 연대 의식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재난이 발생하면 자원봉사자들이 피해 지역으로 모여들고, 지역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서로를 돕는다. 이런 연대 의식은 일본 사회가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의 힘을 극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런 연대 의식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무려 14만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일본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재난 중의 하나다. 지진 직후 불안과 공포가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한다’는 유언비어에 경도된 민간인 자경단이 무고한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대략 수천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수십 년 동안 은폐됐지만, 재일동포와 일부 시민사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현대적인 보도 체제가 정착되기 이전의 일이지만, 재해재난 상황에서 잘못된 정보와 편견이 끔찍한 폭력과 혐오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건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일본 정부나 우파 정치인들과는 달리,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학살된 조선인을 추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실제로 재해재난 상황에서 소수자를 보호하고 정확한 정보 유통을 위해 힘쓰는 비영리 단체가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본에 살 때는 재난에 대비하는 사회 시스템이 촘촘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시로 실감했다. 그 덕분에 ‘재해대국’에 살면서도 비교적 침착하게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비슷한 규모의 자연재해가 한국을 덮쳤다면 혼란과 피해가 더 컸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는 굳이 자연재해가 아니어도 안전불감증 때문에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다.
한국은 지진이나 화산 폭발의 시한폭탄을 늘 안고 사는 일본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연재해의 빈도가 낮고, 피해도 덜한 편이다. 하지만 급격한 기후변화와 기상이변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서 보고되고 있다. 앞으로 올여름 일본처럼 살인적인 폭염이나 이례적으로 강한 태풍이 한반도를 덮칠 가능성이 작지 않은 듯하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지진 발생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 기후위기의 시대를 맞아, 한국 사회도 자연재해에 대해 보다 ‘진지한’ 경각심을 가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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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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