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라시아 회랑 대전
▶ “유라시아, 글로벌 정세·미 패권 유지 좌우할 중심 무대”
▶중 일대일로-러 INSTC-미 IMEC 등 회랑 전쟁 가속화
▶우크라 전쟁 등으로 중부 회랑·북극 항로 개척도 활발
▶“한, 공급망·시장 다변화 위해 중앙아 진출 서둘러야”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 전략가인 고(故)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1997년 출간한 ‘거대한 체스판’에서 “유라시아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목표”라고 규정했다. 유라시아는 미래 세계 정세와 미국의 패권 유지를 결정할 중심 무대라는 것이다. 미국에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는 중국과 러시아·이란이 합세한 거대한‘반(反)패권 동맹’이라고 봤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브레진스키의 분석은 아직도 유효하다. 현재 유라시아 지역 영향력 확대를 놓고 미국의‘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의 중심축 이동)’, 중국의 중국몽(中國夢), 러시아의 대(大)유라시아주의 등이 격전을 벌이는 중이다. 강대국 간 신(新)거대 게임의 양상 중 하나가 유라시아 국제 운송 회랑(corridor) 대전이다.
회랑은 지정학적으로 바다나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폭이 좁고 길이가 긴 통로를 뜻한다. 단순히 물자와 인력을 운송하는 교통로가 아니라 국가 간 협력과 경쟁, 강대국 간 헤게모니 싸움의 압축판이다. 고대 실크로드나 대항해 시대 운송로의 부침에 따라 여러 국가와 도시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듯이 회랑을 지배하는 나라가 국제 경제·외교·안보의 주도권을 쥐기 때문이다.
▲ ‘중국몽’첨병 ‘육해상 일대일로’
유라시아 회랑 전쟁에 불을 붙인 나라는 중국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중국 서부-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을 잇는 ‘실크로드 경제 벨트’와 중국 남부-동남아-중동-아프리카-유럽을 연결하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일컫는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동부를 하나로 연결해 미국의 일극 패권에 대항하려는 거대한 구상이다. 경제적으로는 낙후된 중국 중서부 지역 개발과 저부가가치 산업의 해외이전 등을 통해 자국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중국 중심의 ‘홍색 공급망’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다.
일대일로 참여국은 총 152개국에 이른다. 2013~2022년 중국과 일대일로 협력 국가 간 누적 수출입 총액은 19조 1000억 달러로 연 평균 6.4%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일대일로는 △중국-몽골-러시아(CMREC) △신유라시아 대륙교(NELB) △중국-중앙아시아-서아시아(CCWAEC) △중국-인도차이나 반도(CICPEC) △중국-파키스탄(CPEC) △방글라데시-중국-인도-미얀마(BCIMEC) 등 6개의 경제 회랑으로 구성된다. 노선을 따라 철도·고속도로·항만 건설, 천연가스 파이프라인과 송전망 개통, 자원 개발 등 대규모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회랑이 육상을 통해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NELB이다. 중국 동부 르자오·롄윈강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러시아·벨라루스·폴란드를 경유해 네덜란드·벨기에 등 서부 유럽으로 이어진다. 중국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는 기존의 시베리안 대륙교(SLB), 이른바 ‘북부 회랑(North Corridor)’과 구분하기 위해 중국 횡단철도(TCR) 중심의 새로운 복합 운송 경로를 NELB라고 부르고 있다. 80여 개 노선의 중국-유럽 화물열차가 유럽 25개국 200여 개 도시를 통과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중국의 육상 실크로드 전략이 차질을 빚고 있다. 일부 노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서방의 러시아 경제 제재로 일대일로 연선국들에 대한 투자 리스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대륙교 노선이 혼란에 빠지면 미국의 대중 봉쇄에 대항하기 위한 중국의 대유럽 전략이 일대 타격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노선이 중국-카자흐스탄-카스피해-아제르바이잔-조지아-튀르키예를 거쳐 흑해를 통해 유럽으로 이어지는 ‘카스피해 횡단 국제수송회랑(TITR)’, 이른바 ‘중부 회랑(Middle Corridor)’이다. 카스피해 해상 루트 개발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북부 회랑에 비해 수송 실적이 적은 상황이다. 하지만 러시아를 경유하지 않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유일한 철도 루트인 탓에 중국과 유럽연합(EU)이 도로·철도, 항공로, 송유·가스관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물류망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유라시아주의’의 활로 INSTC
러시아는 국제남북운송회랑(INSTC)을 2028년까지 구축하려 하고 있다. INSTC는 러시아-카스피해 연안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복합 운송망이다. 아제르바이잔을 통과하는 서부 회랑, 카스피해 해상을 통과하는 종단 회랑,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경유하는 동부 회랑으로 구분된다. 평균 거리는 7700㎞로 북해-지중해를 거쳐 수에즈운하를 이용하는 기존 운송로 1만 6000㎞의 절반 수준이다. 기존의 루트는 화물을 운송할 경우 인도 뭄바이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30~45일이 걸리지만 INSTC는 15~24일이면 가능하다.
2000년 러시아·인도·이란 간 3자 협정 체결에도 지지부진하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대외 경제협력의 축을 남쪽과 동쪽으로 돌리면서 인프라 구축이 가속화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INSTC를 통하면 페르시아만의 부동항과 아프리카까지 연결할 수 있어 지정학적·경제적 가치가 높다. 러시아는 북극항로(NSR)의 주도권도 쥐고 있다. 급속한 지구 온난화로 2030년대가 되면 쇄빙선을 동반하지 않고도 연중 내내 운행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란의 경우 INSTC가 활성화되면 서방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물류 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인도 입장에서는 최대의 적인 파키스탄을 우회하면서 중앙아시아·러시아와의 직통 교역로를 확보하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 러시아에 자동차·휴대폰·의약품 등을 수출하는 대신 원유·석탄 등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된다. 특히 인도는 INSTC 구축을 앙숙인 중국의 일대일로 포위 전략과 인도양 제해권 지배에 대응한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 미, EU·인도 등과 중국 포위
미국의 반격 카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글로벌 인프라·투자 파트너십(PGII)’의 하나로 지난해 9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제안한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이다. 인도-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스라엘을 잇는 동부 회랑과 페르시아만과 유럽을 연결하는 북부 회랑으로 구성된다. 참여국은 세계 인구의 40%,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란의 봉쇄 위험이 큰 호르무즈해협과 사고가 빈발하는 수에즈운하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기존 노선보다 시간을 40% 단축할 수 있다. 중동 지역과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것이 미국의 의도다. 유럽 진출을 노리는 중동 국가, 중국 견제를 원하는 인도·베트남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EU 역시 ‘글로벌 게이트웨이’를 통해 아프리카·아시아 국가의 에너지·교통 등 인프라 건설에 2027년까지 3000억 유로를 투자할 계획이다. 유럽의 공급망과 역외 투자를 확대하고 중동·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러시아·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선언적인 의미였을 뿐 이후 중앙아시아 국가 등과의 실질적인 교류 협력은 미미한 실정이다. 지난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한국의 수출액은 각각 19억 6800만 달러, 23억 7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미국·EU·중국·러시아 등은 이미 ‘중앙아시아 5개국+1’ 정상회의를 연이어 개최했지만 ‘한·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회의는 내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릴 예정이다.
▲ “한국, 민관 협력·외교력 강화 등 필요”
더 늦기 전에 유라시아 회랑 대전에 뛰어들어 물류망 다각화를 통한 공급망 안정, 시장 다변화, 에너지 자원 확보 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T) 세계지역연구2센터 센터장은 “강대국이 깔아 놓은 회랑인 만큼 우방국과 함께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한국이 ‘배우고 싶은 나라’라는 장점을 이용해 전력 운송, 문화콘텐츠 등 우리의 강점 분야에는 직접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민관 협력 네트워크 구축, 외교력 강화, 공적개발원조(ODA) 확대와 정책 금융 지원 등 다각도의 대책이 필요하다.
특히 급성장하는 중앙아시아 진출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중앙아시아는 에너지·광물 자원 부국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TITR과 INSTC가 모두 지나가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 기업들의 대러시아 우회 수출 기지로 각광 받고 있고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늘면서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권오경 인하대 아태물류학과 교수는 “성장 잠재력, 수출 기지 확보 등의 측면에서 중앙아시아는 ‘제2의 동남아시아’가 될 수 있는 유망 지역”이라며 “항만·철도 등 인프라 구축에 직접 투자해 운영권을 확보하고 해외 물류 거점으로 활용할 경우 복합적인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나아가 ‘10대 경제 대국’ 위상에 걸맞게 국제 회랑 경쟁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곽 센터장은 “일본처럼 한국만의 국제 회랑 설계도를 보여주면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가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며 “윤석열 정부의 ‘한·중앙아시아 K실크로드 협력 구상’을 더 구체적이고 공격적으로 다듬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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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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