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뤼미에르에서 넷플릭스까지 영화의 역사
▶ 뤼미에르 형제의 50초짜리 ‘열차의 도착’이 시작
▶에디슨, 축음기 판매 위해 뉴욕에 스튜디오 설립
▶영화 기기 독점, 사용 않는 제작사엔 특허 소송
▶동유럽 출신 제작자 에디슨 피해 서부 LA로 이주
▶넷플릭스 위시한 OTT 등장에 영화 산업 새 국면
▶글로벌 OTT 시장 2030년 1770조 원 시대 전망
1920년대를 거치며 할리웃은 미국 영화 산업의 본거지로 부상했다. [로이터]
현대사회에서 영화는 중요한 미디어의 하나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사실(事實)을 동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했던 원시적인 활동사진시대를 거쳐, 실험 영화를 만들고, 무성 영화시대에서 유성 영화시대로, 색채 영화시대로, 대형 영화시대로 영화 산업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실제 영화를 발명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술적 요소가 필요했다. 환등기, 사진기, 고감도 필름으로 이를 갖추기까지 장기간 준비가 필요했다. 도전의 역사이기도 한 영화 산업의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 시네마의 역사가 이곳에서 시작됐다. 영화의 탄생지는 바로 프랑스였다.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뤼미에르와 루이 장 뤼미에르 두 형제(Lumiere Brothers)는 ‘열차의 도착’이라는 50초 분량의 영화를 보여준다. 세계 최초의 영화 공개 상영회였다. 단순히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만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으나 19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 이런 필름 감상 자체가 최초라 모두 흥분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들이 개발한 시네마토그라프 장치를 200대나 동시에 주문하고 운영자를 모집해 촬영 기술을 전수했다. 이들 형제는 빠른 시간 안에 영화가 세계 시장을 겨냥한 사업이 될 것임을 예측했다. 공식적인 ‘세계 최초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리옹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년 3월)이었으며 이 사이에 제작된 영화가 10편이나 있었다.
이들은 사업가로서의 수완과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부족했다. 대중의 흥미를 끌지 못해 흥행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좌절했다. 1897년부터 경쟁사를 따라 익살스러운 코미디나 사극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1898년부터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 흥행은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1905년에는 결국 이들의 영화 제작사는 문을 닫게 된다.
현대 영화의 기반을 자리 잡은 최초의 시나리오 영화는 ‘달세계 여행’이다.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1902년에 조르주 멜리에스가 각본, 감독, 주연을 맡아 제작했다. 최초의 낭만주의 공상과학(SF) 영화로 상영시간은 10분이 넘는다.
흔히 몽타주의 원리로 완성한 작품으로 1915년에 제작한 무성 영화 D. W. 그리피스 감독의 ‘국가의 탄생’을 든다.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 평론가들은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독창적인 카메라 기법으로 기술적인 면에서도 단연 가장 앞선 무성 영화였다. 이 영화는 활동사진 역사상 최고의 흥행 실적을 올렸으며 미국 백악관에서 상영된 첫 번째 영화였다. 문제는 인종차별적인 내용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코네티컷, 일리노이를 포함한 여러 주는 심각한 인종차별주의를 이유로 ‘국가의 탄생’ 상영을 불허했다. 보스턴에서는 이 영화에 반발하는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반감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영화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앞서 그는 이 영화를 “빛으로 쓴 역사”라고 극찬했었다.
1900년대에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은 전구와 축음기를 연이어 발명한 뒤 축음기를 보다 많이 팔기 위해 음악에 움직이는 영상이 함께 나오면 어떨지 상상해 동부 지역인 뉴욕에 스튜디오를 세우고 분량이 좀 더 긴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뉴욕은 영화 산업이 성장하기 좋은 도시였다.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거대도시에서 퇴근한 노동자와 중산층 시민이 즐길 수 있는 여가 생활이 마땅치 않아 최대 2시간짜리 극영화가 미국의 값싼 대중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성공을 한 것이다.
1927년 유성 영화 탄생 이전까지 모두 무성 영화였다. 녹음이 되지 않아 무성 영화에서는 영화 예술의 본질이 영상에 있다고 보았다. 독자적인 미학을 개척해 나간 대표적인 장르가 코미디였다. 크고 과장된 동작으로 언어의 도움 없이 관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특히 사랑받았다. 흔히 이를 1920년대 미국의 ‘사일런트 코미디’시대라고 한다. 이후 유성 영화가 인기를 끌지만 찰리 채플린은 이를 거부하고 1931년 무성 영화 ‘시티 라이트’를 제작해 개봉했는데 놀랍게도 대성공이었다. 채플린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말까지 무성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히틀러의 행각을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1940)를 유성 영화로 발표하면서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게 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는 유럽에서 활기를 띠었다. 이는 1913년 이탈리아의 한 다락방에서 리치오토 카누도, 다랄, 아폴리네르, 피카소, 페르낭 레제,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에 의해 시작됐다. 이러한 운동은 1920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작품 발표로 결실을 보게 된다. 남녀 간의 고루한 신변잡기 연애이야기에 머물러 있던 상업영화 풍토를 경멸하며 인간의 의식세계를 영화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주류 상업 영화보다 ‘앞서있다’는 의미에서 아방가르드 영화라는 칭호를 평론가들이 붙였다.
유성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영화는 ‘재즈 싱어’(1927)이다. 유성 영화는 대사 등의 음성을 입혀 영화가 가진 사실성을 극대화했다. 이전의 ‘컷’과 이후의 ‘컬러’의 도래와 함께 오늘날의 영화 형태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거치며 할리우드는 미국 영화 산업의 본거지로 부상했다. 세계는 영화 제작에 가속 페달을 밟게 되고 이 시기에는 동유럽 출신들이 파라마운트 픽처스, MGM, 유니버설 픽처스 같은 스튜디오를 만들게 된다.
1930년대와 1940년대는 할리우드의 황금기로 여겨지는데 스튜디오 시스템으로 ‘오즈의 마법사’, ‘카사블랑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포함한 많은 고전 영화가 제작됐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할리우드는 TV의 등장과 문화·정치적 지형의 변화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나 TV와 역할 분담을 하며 성공의 역사를 쓴다. 1955년 개봉한 제임스 딘이 출연한 ‘이유 없는 반항’은 그의 유작으로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할리우드가 위치한 로스앤젤레스(LA)는 영화의 도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상도 매년 LA 돌비 극장에서 열린다. 프랑스의 칸, 이탈리아의 베니스, 독일의 베를린이 모두 세계적인 영화제이지만 세계적으로 영화의 종주국과 도시를 미국 LA라고 여기고 있다. 그 배경엔 에디슨이 있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영화용 카메라와 영사기를 독과점으로 판매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동유럽에서 이민 온 초기 미국 영화 제작자들은 에디슨의 이런 행태를 피해 뉴욕의 가장 반대편인 서부 LA로 영화 산업을 옮겼다. 에디슨이 자사 영화 발명품을 사용하지 않는 영화 제작자를 특허법 위반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불법으로 영화를 찍던 동유럽 출신 영화 제작자들은 캘리포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숨어 버렸고 마침내 에디슨은 영화 제작 사업을 포기하게 된다. 당시에 필름 감도가 낮아 아주 강렬한 태양이 필요했다. 사막 지역으로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LA의 화창한 날씨는 영화 산업에 안성맞춤이었다.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가 자리 잡은 LA의 사막 한복판이 할리우드다. 할리우드는 유럽과 달리 스타 시스템을 만들어 내며 승기를 잡는다. 나아가 투자, 제작, 배급, 상영에 이르는 영화 산업 전 과정을 메이저 스튜디오가 독점해 비교 불가능한 경쟁력을 갖춘다.
과거 TV가 등장하던 시기와 달리 영화 산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비디오 대여점으로 출발한 넷플릭스가 2007년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OTT)를 시작한 이후 서서히 영향력을 키운 이런 형태의 서비스는 이제 영화와 방송 업계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영화 제작사, 드라마 제작사도 너나 할 것 없이 OTT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2,510억 달러(약 345조 원) 규모로 추정되는 글로벌 OTT 시장은 연평균 25.0% 성장, 2030년이면 약 1조2,830억 달러 규모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좋은 이야기, 훌륭한 연출, 멋진 연기가 어우러진 작품이 사람들을 사로잡는다는 본질은 같다. 우리나라도 1,000만 명 이상 관객을 모은 영화가 여러 편 있다. ‘명량’이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 기록을 깬 지도 상당 시간이 흘렀다. 한류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우리 드라마와 영화가 좋은 성적을 지속하는 토양을 만드는 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