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나 글로 조리있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어떤 ‘느낌’이 있다. 공정(公正, fair)이 그러하다. 우리는 공정을 몸과 마음으로 대번에 안다.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아프고 때로 분노의 감정이 들기도 한다. 불공정이나 차별은 한 개인의 사회적 기회나 권리를 박탈하고,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준다. 공정의 결여는 사회를 내로남불 특권과 반칙의 세상으로 만든다. 공정 여부는 개인의 내면세계와 사회적 실존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공정이 시대의 화두가 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정치인치고 공정을 말하지 않는 정치인은 없다. 윤석열 정부는 ‘공정과 상식’을 정부의 중점 과제(agenda)로 내걸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최근‘ 채 해병 특검 발의 ’‘대통령부인 명품백 수수 의혹’ 등은 윤 정부가 공정과 상식의 실현에 실패하였음을 보여준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하며, 흔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공정의 개념을 규정하기란 어지간히 어렵다. ‘공정’에 대한 이해가 문화권, 개인의 가치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기계적 혹은 일률적 공평(公平)을 공정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합리적인 사회원리로 공정을 제시하며,‘공정으로서 정의’를 주장한 존 롤즈(John Rawls)의 <정의론>이 난해하고 방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 공정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일어났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대통령 부부 명품백 수수와 관련하여, 직무관련성이 없고 공직자의 배우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혐의 없음으로 종결’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내노라하는 법전문가들이 모여있는 권익위에서 내놓은 결론 치고는 매우 옹색하고 어처구니 없다. 대다수 국민 정서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이해 할 수 없는 발표이다. 공정하고 청렴한 사회를 표방하며 제정 공포된 이른바 김영란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 결정이다. 권익위의 존립(存立)여부를 다시 생각케 하는 결정이다. 최근 권익위를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다수의 문의들이 쇄도하고 있는 현상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권익위의 궁색하고 물렁한 결정문에 따르면 앞으로 한국 사회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의 배우자가 고가의 선물을 받아도, 직무관련성만 없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의 배우자에게 선물을 주면서 이것은 ‘직무와 관련한 선물’이라 말하겠는가?
권익위의 발표는 법조문(條文)에 비추어 맞을지 몰라도, 부정부패 방지와 청렴사회를 규현하려는 ‘김영란법’ 제정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옳다고 볼 수 없다. 함께 고르고 맑고 올바른 세상을 살아가려는 한겨레의 높은 도덕적 윤리적 의식과 정체성을 외면한, 국민적 정서와 동떨어진 비양심적 비도덕적 결정이다. 이는 공정의 훼손이며, 공정의 가치가 땅에 떨어져 깨지는 모골 송연한 소리이다. 나라 무너지는 소리이다. 공정이 무너지면 나라의 법과 제도와 조직은 유명무실이다.
공정을 지켜야 한다. 권익위가 지켜야 할 대상은 특정인이 아니라, 국민이며 나라를 고르고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공정의 가치이다. 부정부패나 특권없이 함께 고루 사는 정의로운 세상, 따듯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려면 공정이 사회적 표준이 되어야 한다.
고대로부터 공정은 하늘의 뜻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공정하신 분이심을 말씀하며(시편11:7), 하느님을 닮아 다른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살라고(레위 19:15, 요한 7:24) 말씀한다. 공정은 하늘을 닮은 삶이며, 사람다움의 길이다.
세상은 공정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사회이며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다. 공정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한 나라의 법과 제도와 기관을 살아있게 함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상생(相生)과 행복의 길이다.
사회생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2023년 서울대하계 졸업식 축사에서 ‘공평은 양심을 만나야 비로소 공정이 된다’며 졸업생들에게 치졸한 불공정한 공평이 아니라 ‘속 깊고 따뜻한 공정’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양심으로 승화된 공정의 가치를 예찬한다.
공정은 양심 곧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의 발현이다. 공정이 세상 만인(萬人) 마음과 삶에, 나라의 법과 제도 안에 스며들어야 한다. 공정은 한 개인이 지녀야 할 사람다움의 기본이며, 한 공동체나 나라가 반드시 지녀야 할 나라다움의 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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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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