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일요일은 미국에서 ‘아버지날’이다. 어머니날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꽃가게에 손님도 제법 많고 식당은 가족 식사 모임으로 북적댄다. 나도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고 이제 할아버지까지 되었으니 아버지날에는 ‘대접’ 좀 받아도 되지 않나 싶지만, 아직도 아버지날이 되면 나 자신보다는 나의 아버지가 먼저 생각난다. 그런데 아버지가 작년 초에 돌아가셨기에 작년에 이어 벌써 두 해째 아버지날에 내가 챙겨드려야 하는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는 여동생인 큰 딸이 사는 하와이로 거주지를 옮기기로 결정을 하셨다. 세 자녀 중 악화된 건강 회복을 돌보기 위해서는 은퇴한 딸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큰 결단이 필요했다. 미국에 이민 와 거의 50년을 살았던 지역에서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게 어디 쉽겠나. 그런 결단이 어렵게 느껴짐은 장남인 나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여동생보다 내가 더 나은 보살핌을 해 드릴 수 없는 처지이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떠나시기 몇 달 전부터 갑작스럽게 악화된 병세로 인해 침대에 누워 계시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였다. 뉴욕에 살던 내 둘째 아들과 여동생의 캘리포니아에 사는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인사드리려고 찾아왔다. 다시 못 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랬던 것 같다. 그 두 녀석은 할아버지 침대 옆에 앉아 간간이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 드렸다. 그리고 바짝 마른 손을 잡으며 할아버지에게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애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차마 그런 인사를 드리지 못 했다. 하와이로 떠나기 바로 전에 거기에 가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오게 된다면 분명히 백세까지는 살 것이라고 하시던 아버지 말씀의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고, 다시 못 뵐 수 있겠다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처럼 들리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그런 작별 가능성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고향 해주에 홀어머니와 두 남동생을 두고 홀로 남하해 정말 쉽지 않은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식들과 가족을 위해 하셨던 희생, 특히 나를 위해서는 어려운 재정 형편 가운데에서도 최대한으로 뒷받침해 주셨던 아버지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해 다시 돌아오신 후에나 하겠다고 가슴 속에 꾹 눌렀다.
또 하나 드리지 못 한 말은 나에게는 손녀인 아버지의 갓난 증손녀를 보러 다녀오셔야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태어난 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외부 여행을 할 수 없는 증손녀를 지금 안 가보시면 언제 보시겠냐. 비행기로 거의 10시간이나 가야 하는 하와이까지는 가겠다고 하시면서 비행 시간이 겨우 한 시간 남짓한 곳에 있는 증손녀를 하와이에 가기 전에 보러 가셔야 하지 않겠느냐. 증손녀도 증조할아버지에게 한 번 안겨 보는 권리가 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러한 말들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하와이행이 마지막 여행길이 될 수 있고 이제 곧 돌아가실 수도 있다라고 들릴 수 있는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와이로 떠나셨고 그 후 두 주 만에 하와이도 떠나셨다. 그렇게 빨리 하와이를 떠나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의 마지막 길 떠남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만고진리를 경험해 본 것이다.
내일 모레로 다가온 아버지날을 맞으며 아버지가 하와이로 떠나시기 전에 내가 못 드렸던 말들을 모두 드렸어야 했는지 아직도 판단이 잘 안 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버지가 계셨으면 좋아하시던 생선회와 초밥을 안주 삼아 따끈한 정종 한 병을 나와 둘이 비웠을 텐데 이번 아버지날에 그럴 수 없음이 너무 아쉽다. 다시 한 번 더 뵐 수 있다면 평생 한 번도 아버지에게 못 해 본 ‘사랑한다’는 말씀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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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VA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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