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성은 여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과 마주하면 만족감은 두 배, 세 배 커진다. 경남 산청과 합천의 경계인 황매산은 매년 이맘때 정상 부근 능선 좌우가 철쭉으로 붉게 물든다. 연둣빛과 진홍빛이 어우러진 모습은 곧 녹음으로 뒤덮일 고산의 마지막 봄 선물이다. 지난 2일 오후 황매산에 올랐다가 꽃잎보다 붉고 황홀한 진홍빛 노을에 취했다.
■철쭉 축제, 봄의 황매산
해발 1,113m,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지만 황매산에는 고산 특유의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없다. 이를테면 품이 넓고 넉넉하다든가, 오르기 힘든 악산이라는 묘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산청에서든 합천에서든 능선 바로 아래까지 차로 갈 수 있고, 거기서부터 이어진 탐방로도 동네 뒷산 산책하듯 순탄하기 때문이다.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니 고산임에도 철마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변에 지리산과 덕유산 능선이 웅장하게 둘러져 있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철쭉만 염두에 둔다면 황매산이 주는 즐거움의 절반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매산으로 가는 길 자체가 행복한 여정이다. 산청 읍내에서 황매산까지는 약 17㎞, 구불구불 산길을 넘다 보면 산골짜기에 터를 잡은 마을과 계단식 농경지가 숨은 그림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산청읍과 차황면 경계인 달음재에서 잠시 쉬어간다. ‘천왕봉 전망대’라 이름한 팔각정에 오르니 지나온 방향으로 지리산 산줄기가 우람하게 펼쳐진다. 차황면 소재지를 지나면 길은 한층 더 구불구불한데, 도로 양쪽으로 노란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단 꽃가지가 늘어져 있다. 산 이름처럼 황매화를 가로수로 심었다. 대부분 무심코 지나치지만 지역의 명산에 하나라도 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황매산은 넓고 크다는 의미의 ‘한뫼산’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후에 한자어로 바꾸며 황매산이 됐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황매화와는 상관이 없는데도, 산청군과 합천군 홈페이지에 ‘황(黃)은 부(富), 매(梅)는 귀(貴)를 의미한다’는 해설을 곁들여 놓았다.
다시 고개(두무재)를 넘으면 내리막길 도로 우측에 ‘황매산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바위 능선 아래로 산줄기가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몇몇 마을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다. 아래부터 신촌, 만암, 상법마을이다. 전망대 한쪽에 누구의 작품인지 모를 시가 한 수 적혔는데, ‘마너물 내 고향’이라 표현하고 있다. 황매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지명으로 굳어졌고, 만암마을은 마너물을 한자로 옮긴 이름이라 한다. 마을 주변 경사지는 층층이 계단식 논밭이다. 모내기를 앞두고 흥건하게 물을 댄 논에 햇살이 내리쬐며 수면이 반들거린다.
예전 황매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각 마을에서 연결돼 있었다. 산행은 대개 신촌마을에서 출발해 상법마을로 내려오는데, 오르는 데만 2시간 정도 걸린다. 지금도 번잡함을 피해 호젓하게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은 7부 능선에 조성된 미리내파크까지 차로 오른다. 주차장과 카페, 캠핑장을 갖춘 공원이다. 마을부터 미리내파크까지 도로는 가파르고 굴곡이 심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미리내파크 주차장에 도착하니 울긋불긋한 기운이 산자락을 감싸고 있다. 분홍빛 철쭉 꽃송이 뒤로 황매산 정상 부근 바위 봉우리가 거칠고 웅장하다. 매부리를 닮은 봉우리에서 가파르게 쏟아져 내린 산자락에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듬성듬성 머리를 내민 키 큰 나무가 섞여 단조로움을 상쇄한다. 매끈하게 포장된 탐방로는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능선까지 연결된다.
해발 900m 능선 부근에는 짧은 석축 위에 망루가 세워져 있다. ‘황매산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지만 산청군이나 합천군 어느 자료에도 산성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전망대 겸 포토존 구실을 하는 구조물이다. 망루 뒤편에 전국에서 몰린 사진작가가 삼각대를 펼치고 있다. 지난 2일 산성 주변 철쭉은 아직 개화가 덜 된 상태였다. 축제가 12일까지 잡혀 있으니 이번 주에는 능선까지 붉게 물든 장관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망 좋은 암자와 고즈넉한 한옥마을
황매산 철쭉을 즐기고 시간이 난다면 정취암과 단계마을을 함께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정취암은 차황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대성산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 6년에 창건한 사찰로 기암절벽에 매달린 듯 자리 잡고 있어 내려다보는 풍광이 아찔하면서도 시원하다. 거북처럼 얹혀진 바위며 그 옆에 뿌리 내린 소나무도 신비스럽게 보인다. 절간 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너럭바위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는데, 산 아래 마을과 들판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속세를 벗어난 적막감만 가득하다.
인근 신등면 소재지의 단계마을은 한옥과 돌담길이 정겨운 마을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옛 담장이 골목골목 이어져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김인섭 고택과 권씨고가, 박씨고가 등 오래된 한옥뿐만 아니라 순천박씨 고택을 개조한 한옥스테이와 소박한 민가까지 각자의 방식대로 멋을 낸 돌담이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학교, 파출소, 상가 등도 한옥이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마을 이름은 조선 후기 문인 단계 김인섭(1823~1903)의 호에서 따왔다.
산청의 모든 길은 경호강으로 연결된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산청 땅을 북에서 남으로 흘러 진주 남강댐에 합류한다. 길이 32㎞의 짧은 강이지만 폭이 넓고 물이 맑아 산청을 더 산청답게 하는 물줄기다. 대전통영고속도로나 함양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3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여러 차례 그림 같은 풍경이 스치는데, 바로 경호강이 빚은 풍광이다.
경호강 상류 생초면에 봄이면 반짝 주목받는 관광지가 있다. 이름도 거창한 생초국제조각공원이다. 산청국제현대조각심포지엄에서 확보한 국내외 작가의 작품 27점으로 조성한 공원이다. 그러나 조각을 보자고 이 공원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조각공원에 조성한 꽃잔디에 이끌려 찾아오는 관광객이다. 분홍과 흰색 꽃잔디로 경사면에 축구공, 물고기 등 여러 형상의 꽃밭을 만들었다. 지금은 절정을 넘겨 색이 바래고 있어 한쪽에 또 다른 꽃을 심고 있다. 경호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은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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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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