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색해진 ‘두 번째 기회의 달’
▶ 매년 4월 채용장벽 해소 입법 촉구
▶대선 앞둔 올핸 처벌 강화 역주행
▶매체 선정성이 범죄감소 현실 왜곡
지난 4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아치스트리트 인디펜던스몰. 38개의 사람 형상이 놓였고, 투명한 박스가 덮였다. 실물 크기 인형의 재료는 종이 서류다. 범죄 이력 기록 말소에 필요한 실제 문서 120만여 장이 작품에 투입됐다고 이 설치 작업 아이디어를 낸 미국 광고대행사 드로가5는 밝혔다.
호주 기반 다국적 예술가 집단 글루소사이어티가 제작한 이 조형물의 이름은 ‘대기 인력(The Waiting Workforce)’. 구직에 실패한 전과자를 형상화했다. 이들은 폭력이 수반된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사법 제도가 요구하는 죗값을 치렀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다시 죄를 짓지도 않았다. 사회 복귀 채비를 마친 셈이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계속 대기 상태다. 높은 장벽이 버티고 있다. 전과 기록이다. 미국 민주당 계열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AP)에 따르면 고용주 10명 중 9명, 집주인 5명 중 4명, 대학 5곳 중 3곳이 여전히 채용·임대·입학 심사 때 찾아온 이의 신원을 조회한다. 전과는 핵심 정보다.
펜실베이니아주는 2018년 가벼운 비폭력 유죄 기록일 경우 10년이 지나면 공개되지 않도록 자동 봉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50개 미국 주 중 처음이었다. 이듬해 유타주부터 지난해 뉴욕주까지 11개 주가 뒤따랐다. 조형물이 펜실베이니아에 설치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인형 수는 이른바 ‘클린 슬레이트(Clean Slate·깨끗한 경력)’ 법안을 아직 도입하지 않은 주가 몇 곳인지를 보여준다. 이들을 향한 입법 촉구가 설치 의도다.
◇ 코로나19가 연 창
미국에서 4월은 ‘두 번째 기회의 달(Second Chance Month)’이다. 2014년 CAP 보고서를 통해 제안됐다. 적게는 7,000만 명, 많으면 1억 명의 미국인이 범죄 기록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보고서는 주목했다. 미국인 3명당 1명꼴인 이들은 대부분 경범죄자들이다. 체포됐지만 유죄 판결은 면한 이도 많다. 그런데도 전과가 평생 굴레가 될 가능성이 갈수록 커진다. 인터넷을 통한 데이터 접근이 용이해지면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뒤 매년 3월 말 선언문을 통해 4월이 두 번째 기회의 달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도 그는 새삼 “미국이 새로운 시작의 약속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두 번째 기회의 달(4월)에 우리는 형사 사법 시스템이 그런 이상에 부응하고 감옥에서 지역 사회로 돌아온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의 기회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지 재점검한다”고 말했다.
필라델피아 조형물 설치 의뢰인은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다. 4월에 시기를 일부러 맞췄다. 작품은 이달 내내 시민들에게 전과 자동 말소 입법의 필요성을 떠올리게 한 뒤 철거된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미국 기업들을 상대로 전과자 채용을 독려 중인 인물이다. 그는 2020년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미국은 두 번째 기회와 구원을 믿는다. 두 번째 기회는 사람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하고 더 많은 돈을 벌게 할 수 있다. 재범률도 줄인다.”
JP모건체이스 주도로 전과자를 적극 채용하는 기업 연합체 ‘두 번째 기회 비즈니스 연합’이 결성된 것은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난 뒤 기업이 구인난을 호소하기 시작하던 2021년이다. 실직의 ‘쓰나미’ 때 대거 잘려 나간 노동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서 이후 ‘대퇴직(Great Retirement) 시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29곳이던 연합 회원사는 50곳까지 늘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22년 10월 인력 부족으로 애를 먹는 고용주들이 전과자도 가리지 않고 채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과자 채용이 선의의 발로라기보다 고육책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코로나19가 뜻밖에도 전과자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 준 셈이었다.
◇ 대선이 닫는 창
그러나 올해 현실은 대조적이다. 순풍을 타나 싶던 경범죄 전과 자동 말소 입법 운동이 역풍에 직면하는 분위기다. 특히 상대적으로 범죄자 개인의 처벌보다 구조적 범죄 예방책 마련 위주의 접근을 시도했던 진보 성향 주·도시까지 절도를 중범죄로 재분류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됐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중도 부동층 유권자가 치안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다.
캘리포니아가 대표적인 경우다. 정부·의회가 민주당 일색인 캘리포니아는 2014년부터 피해액이 950달러(약 130만 원) 미만인 절도는 중범죄로 기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올 들어 개빈 뉴섬 주지사가 전향했다. 해가 바뀌자마자 절도범 처벌 강화 법안 발의를 의회에 촉구했고, 의회는 조직 절도에 가담만 해도 최대 3년형을 부과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법안을 2월 내놓았다.
역시 시장이 민주당 소속인 워싱턴시 의회는 지난달 조직적 소매 절도 처벌 규정을 신설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배경은 오해다.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지난해 5월 옛 트위터(현재 X)에 “너무 많은 샌프란시스코 시내 매장들이 문을 닫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연상될 정도”라고 썼다. 월그린이나 타깃 등 미국 소매 체인들은 매출 실적이 저조한 지점들을 닫으며 팬데믹 이후 도심 유동 인구 감소, 온라인 구매 활성화 같은 요인 대신 급증한 절도를 마이너스의 핵심 원인으로 꼽았다.
오프라인 매장 상품을 훔쳐 온라인 시장에 내다 파는 식의 추세 변화에 편승한 신종 수법이 부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데이터가 전한 현실은 소매 업체의 대담한 요약과 달랐다. 미국 뉴욕대 브레넌정의센터가 지난달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 이후 줄곧 감소해 온 전국 단위 절도 규모는 팬데믹 당시인 2020, 2021년 급감한 뒤 2022년 반등했지만, 2019년과 비교하면 여전히 작다.
소매 업체가 하는 얘기를 전부 믿을 수도 없다. 미국 유통업체 타깃이 지난해 10월 폐점한 오리건주 포틀랜드와 워싱턴주 시애틀의 매장은 문을 닫지 않은 매장보다 범죄율이 더 낮았다고 브레넌정의센터 보고서는 지적했다. 업체 1만6,000여 곳의 이익 단체인 전미소매연합(NRF)은 지난해 4월 업계 간행물을 통해 조직적 소매 절도 피해액이 2021년 전체 손실 945억 달러(약 131조 원)의 절반에 육박한다고 주장했다가 같은 해 12월 실수였다며 철회하기도 했다.
◇ 오해와 진실
바이든 행정부의 치안 정책이 실패했다는 게 공화당 주장이다. 하지만 범죄에 너그럽다며 주민들이 시장을 내쫓으려 하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는 지난해 6월 기준 절도 규모가 2019년에 비해 5% 줄었다.
줄어든 범죄가 절도만인 것도 아니다. 지난달 19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공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 살인 범죄는 전년 대비 13.2% 감소했다. 차량 절도만 빼고 모든 종류의 범죄가 줄었다. WSJ는 지난 14일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 범죄 분석가 제프 애셔를 인용해 올 1분기 133개 도시 살인 사건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20% 감소했다고 전했다.
물론 미국인들이 믿는 현실은 다르다. 지난해 12월 갤럽이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77%가 미국에서 범죄가 더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미국 뉴올리언스주 로욜라대의 로널 세르파스 교수는 WSJ에 “수치 감소가 대중의 범죄 관련 인식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셔는 미국 NBC방송에 “제도권 언론과 소셜 미디어 모두 폭력·무질서를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온·오프라인의 선정성 경쟁이 범죄 발생 통계와 관련된 현실을 왜곡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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