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은 1545년 이순신 장군께서 태어나신 날이다. 50년 전 한국 정부에서는 이 날을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법정기념일로 선정했다. 한국에서 개인의 생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은 이 충무공과 세종대왕 뿐이며 세종대왕의 생일인 5월 15일은 스승의 날로 되어있다.
이 충무공은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양반 집안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어린 시절에도 어른들에게 주눅이 들지 않고 기개가 당당했다고 한다. 어렸을때 잘 아는 사이였으며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의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며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겁이 없고 용감한 기운이 있었다"고 썼다.
스무살 무렵 장가를 가고 무관이던 장인의 영향을 받아 무인(군인)의 길을 가게 되었을 거라고 후세 사람들은 추측한다. 스물일곱살때 도전한 무과 과거시험에서는 말에서 떨어지며 왼쪽 다리를 다쳐 실패하고 서른한살에 드디어 합격해 지휘관이 된다. 그는 문인이 읽는 책뿐만이 아니라 당시 구할 수 있는 중국의 병법서도 읽었다고 이 장군의 조카가 장군의 일대기 행록에 썼다.
그는 근무하는 곳마다 불의를 눈감아주지 못하고 원칙을 따르는 성격 때문에 공을 세우고도 부당한 대우를 받곤 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전과는 결국에는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여진족과의 전투경험은 조선의 장군으로서 경험하기 힘든 귀한 것으로 그 후 맞이하는 임진왜란에서 빛을 보게 된다. 이 왜란이 일어나기 14개월전, 일본의 움직임을 염려한 유성룡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순신 장군은 파격적인 승진의 전라좌수사가 된다.
그는 근무지 여수에 가자마자 왜군에게 없는 비대칭 무기를 준비한다. 바로 돌격을 위한 거북선과 여러 종류의 총통이라는 대포다. 거기에 그 당시 해군의 싸움은 군인들이 상대방 배에 갈고리를 걸고 올라가 상대방 군인을 죽이는 방식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제독)은 판옥선 갑판 위를 두꺼운 나무판자로 덮고 칼이나 송곳을 촘촘히 꽂아 적군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왜군이 볼 때에는 포까지 쏘아대는 거북이 모양의 이 돌격선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거기에 바다의 지형과 물의 흐름을 이용하는 전술로 1592년(임진년) 4월 왜란이 시작된 이래 이장군은 모두 23전 23승이라는 세상에 유례없는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이듬해부터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작된 강화회담은 4년을 끌다가 깨지고 왜군이 조선을 다시 쳐들어오는 정유재란(1957년)이 일어난다. 일본 수군(해군)은 이순신에게 잃은 병력의 반을 보충하고 조선의 판옥선을 능가하는 길이 32미터의 아타케부네라는 초대형 선박을 준비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일본이 보낸 간첩의 계략에 넘어가 이순신을 체포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원균을 앉히는 치명적 실수를 한다. 선조 임금은 이순신의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여 그를 서울로 끌어와 처형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충신들의 간곡한 호소로 감옥에 들어간지 28일만에 풀려나게 된다.
그해 8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은 부하 장수들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고 일본 해군의 야간작전 등 치밀한 공격앞에 크게 패하여 이순신이 준비해 놓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60여척을 잃고 수많은 군인과 함께 그도 전사하고 만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배설 장군은 멀미로 이틀동안 배에서 누워만 있었는데 참모들이 배 12척을 이끌고 한산도까지 도망나왔다고 한다.
이 패전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자원하여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군관 9명을 데리고 노량으로 내려간다. 이튿날 배설을 만나서 자세한 전투 소식을 듣는다. 전투가 불리해지자 통제사 원균이 먼저 도망가고 뒤이어 다른 장수들도 육지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5개월만에 다시 통제사가 되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차곡차곡 전투력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내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맞아 승리를 되찾는다. 이제까지 이민웅 교수가 쓴 책 이순신평전을 더듬어 보았다.
일본이 지배하던 1931년, 이충무공 종가의 가세가 기울어 아산에 있는 충무공의 묘소와 땅이 경매로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조직되어 성금 모금을 벌였다. 불과 한달여 만에 빚의 7배에 이르는 금액이 모였고, 채무를 상환하고 남은 돈은 현충사를 중건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1920년대 일본의 해군전략가 가와다 이사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순신에게 넬슨에게와 같은 거국적인지원과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더라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당했을 것이다'.
2016년 애나폴리스에 있는 미 해군 연구소( USNI) 는 ‘What is The Greatest Warship of All Time?’ 이라는 설문조사를 하여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함 일곱을 소개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의 목제 범선(Frigate) USS Constitution 다음으로 Korean Turtle Boats (한국의 거북선)이 보인다. 90대의 전투기를 싣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항공모함 USS Enterprise, 원자력 잠수함 USS Nautilus, 그 외 미국의 USS Iowa, 영국과 독일의 전함 하나씩 보일뿐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일본의 함대도 없다. 자랑스럽다.
거북선을 소개하면서 강력한 심리전 무기로 연기를 내뿜는 용머리를 가지고 속도는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났으며 적군이 올라올 수 없는 배였다고 설명한다. 1797 년에 만들어진 USS Constitution 은 현재 보스톤(Boston) 항에 전시되어 있어 배안에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재작년 이순신미주교육본부에서는 길이 27피트의 거북선 모형을 만들어 워싱턴 DC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퍼레이드에 그 모습을 선보였고 지금은 한인들 행사에 전시되고 있다.
이 배 모형을 볼 때마다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시는 이충무공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그는 425년 전에 돌아가셨으나 그의 피는 오늘 우리 몸속에 살아 흐르는 것을 느낀다.
그가 오늘 한국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내가 만든 거북선을 원균처럼 부수지 마라. 한국은 내가 목숨 바쳐 구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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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길 목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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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해외한인사회에 있는 일본파트너들은 이순신 증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