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한인 복지센터는 1974년 워싱턴 DC 한 교회(워싱턴 한인 연합 장로 교회)에서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워싱턴 한인 봉사센타"로 미국 시스템을 잘 몰라서 정착에 힘들어 하던 이민자들을 위해 “봉사" 하겠다고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봉사센타는 community 에 base하는 기관으로 재탄생했다. 구제와 봉사를 미션으로 하는 봉사센타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회원이 되는 membership organization 으로 다시 태어났다. Nominating committee(공천 위원회)에서 추천하면 회원들이 투표해서 이사가 되고, 3년마다 재신임 투표를 하였다. 이사들은 매년 회비를 내면서 이사회를 구성하여 봉사센타의 모든 일을 결정하고 집행하였다.
아파트를 구하는 일이나 자녀들 학교 등록을 돕는 등 아주 작은 것들부터 도움을 주기 시작해서 수십년간 세월과 함께 성장하면서 센터 미션을 수시로 상향 조정하고, 2012년에는 이름도 “워싱턴한인복지센터”로 변경했다. 이제는 4백만불의 연예산과 30명의 전문적인 직원들이 우리 동포사회를 넘어서 아시안 이민사회의 복지증진을 위해서 일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발전을 했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복지센터가 이렇듯 성장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로 가는 여정에 출애굽과 광야 40년이 있었던 것처럼 복지센터도 광야를 지나온 아픈 역사가 있다. 역사는 반복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이 두려워 출애굽과 광야 40년을 자손대대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우리는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한다.
금년에 50주년을 맞는 복지센터가 시작한 지 25년쯤 되면서 재정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여 2001년 초에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센터의 부채가 자산의 몇배로 불어 났고 이를 갚을 능력이나 해결의 전망이 없었다. 더욱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직원들의 봉급을 제 때에 줄 수 없었고, 사무실 렌트가 밀려서 독촉에 시달리고, 마침내는 IRS가 밀린 세금(FICA tax)으로 은행 계좌를 차압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파산이 정답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하는 이사회의 건강 상태였다. 복지센터 1세 이사들은 지난 수십년간 너무나 힘든 많은 일들을 해왔다.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있는 저소득층 노인 아파트(University Gardens)를 지으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었다. 나이도 이제는 젊지않아 알게 모르게 burn out 되어갔고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심지어는 별것아닌 것으로도 책상을 치고 큰소리로 다투어서 회의가 중단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등 이사회 이상 건강이 중증이 되어갔다. By-laws에 규정된 quorum (회의 정족수) 미달로 회의도 자주 무산됐다.
2001년말 이사회가 겨우 열려 그 회의에서 나는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그후 6년을 이사장으로 재임했다. 이즈음 복지센터가 무엇보다 먼저해야할 급선무는 이사회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젊은 피의 수혈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2세들은 아직 너무 어렸고 그래서 부모들을 따라 이민온 1.5세에 집중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자기 분야에서 기반을 닦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인재들이 있었다. 함께 동역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1.5세들을 이사회에 영입하였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사회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언어가 문제였다. 한국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한국말이 서툴렀던 것이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그래서 회의 참석이 불편해진 것이었다.
복지센터 초창기 미국장로 교단(National Capital Presbytery, PC USA)에서 재정 후원을 받았는데 이로인해 미국인 목사와 장로들이 이사로 있어서 영어로 회의 진행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영어로든 한국말이든 편한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사회가 필요한 것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재능과 경험과 시간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그렇게 봉사를 시작한 이사들중 지금은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한글학교 역할도 한셈이다.
이렇게 재건된 이사회는 복지센터 역사를 또 한번 바꾸어 놓는 역할을 잘도 감당했다. 또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많은 수고를 한 4대 총무가 2002년에 정년 퇴직하고 젊고 활기찬 5대 총무를 영입하였다. 이렇게 전열을 새로 갖춘 이사회와 스텝이 수레의 양 바퀴가 되어 센터의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채무자들과 건물주를 만나 끊임없는 설득과 양해를 구하고 어려움을 겪던 직원들을 위로하였다.
특별히 그동안 해오던 모금활동의 한계를 알고 Grant 를 따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Grant application 을 작성 하는 staff뿐만 아니라 이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지역정부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을 만나서 로비를 하고 그들이 주관하는 모임이나 기금 모금 행사에도 부지런히 참여하여 give and take 의 묘를 살렸다. 이러한 일에 재능과 은사를 갖춘 이사들도 있었다. 이렇듯 총체적인 노력이 조금씩 pay off 되어 재정상태가 아주 천천히 회복 되기 시작했다.
2003년 11월 에는 렌트비도 줄이고 동포 인구 변동에 따라 본부 사무실을 메릴랜드에서 버지니아 에난데일 미국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of Annandale)일부를 빌려서 옮겼다. 그런데 오래된 이 건물은 냉난방 장치가 허술해서 고생이 많았고, 또 빌린 공간이 협소해서 직원들 책상둘 곳도 마땅치 않았다. 정말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2005년 3월에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면서 7700 Little River Turnpike, Annandale, VA 지금의 사무실로 이사와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너무 좋았다.
50년전 이를테면 모태 신앙으로 태어난 복지센터는 그때부터 모든 회의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쳤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간구하여 드리는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어 복지센터 이사회, 위원회 등 모든 회의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다. 그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이르러 출애굽과 광야 40년을 이끄신 그 하나님이 우리가 광야를 지날때에도 동행하신 것을 간증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린다.
나는 이제 백발이 성성하고 친구들의 부음이 한달이 멀다하고 전해오지만 그래도 막내동이다. 복지센터 1세대의 막내동이다. 한번 결정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열정을 다해 목표를 달성했던 용감한, 조금은 무모하기도 했던 1세들과 함께 한 막내동이다.
차세대에 연결 고리가 되어 mission 바톤을 넘겨주고, 우리가 지나온 광야를 절대 잊지않게 전수해야 하는 숙명적인 막내동이다. 헌데 세월이 흘러 50주년을 맞으면서 이들 차세대가 복지센터의 지속되는 미션과 비전을 논의하고 더구나 그 다음 세대를 생각해서 물려줄 계획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복지센터 미래가 보이는듯 하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걸어가는 앞길에도 동행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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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7대 이사장(2002-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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