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수출통제 구멍’ 우려하며 한국 기업의 장비수출에 문제제기
▶ 소식통 “결정한 바 없지만 美우려 해소위해 어느 정도 들어주려 해”
▶ 정부, 반도체산업 피해 고민…’美, 자국기업 위해 한국 견제’ 시각도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시찰하는 한미 정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중국에 수출하는 반도체장비를 엄격히 통제하라는 미국의 압박이 갈수록 커지면서 한국 정부가 미국 주도의 대(對)중국 수출통제에 어느 정도로 보조를 맞춰야 할지를 검토하고 있다.
한미관계 등을 고려하면 미국의 요청을 마냥 뿌리치기 쉽지 않지만, 한국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 정부의 고민이 깊은 형국이다.
12일 연합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미국은 지난 2022년 10월 자국 기업이 중국에 첨단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를 수출하지 못하게 하는 규제를 발표한 이후 동맹에도 비슷한 수준의 수출통제를 도입하라고 압박해왔다.
처음에는 미국처럼 반도체장비 기술 수준이 높은 네덜란드와 일본이 주요 압박 대상이었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한국에 대한 압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이제는 미국이 한국의 특정 기업을 거론하면서까지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장비 수출을 문제 삼는 상황이라고 소식통들은 연합뉴스에 전했다.
지난 2월에도 미국 상무부와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간에 관련 협의가 진행됐다.
한미 수출통제 협의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연합뉴스에 "워싱턴에서 한국이 대중국 반도체 기술 수출통제의 구멍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어 이를 불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도 미국처럼 ▲ 핀펫(FinFET) 기술 등을 사용한 로직 칩(16nm 내지 14nm 이하) ▲ 18nm 이하 D램 ▲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수 있는 장비·기술을 중국 기업에 판매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실제로 그 정도 수준의 장비를 중국에 판매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한미 간에 시각차가 있지만, 미국은 미래에 한국 장비기업의 기술이 그 수준까지 발전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다른 소식통은 전했다.
이 소식통은 "미국은 정말 많은 것을 원한다"면서 "정부가 미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국익 관점에서 봤을 때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게 맞는지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아직 결정한 바는 없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는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그 요구를 "어느 정도"는 들어주고자 하는 게 정부 기조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많이 고민하는 지점은 대중국 수출통제가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에 미칠 영향이다.
한국 업체들이 생산하는 반도체장비의 기술 수준이 미국, 일본, 네덜란드에 못 미치는데도 주요 시장인 중국에 대한 수출을 통제하면 반도체장비 산업의 자립화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그간 미국 기업들은 미국만 반도체장비 수출을 통제한 탓에 중국 시장에 생긴 미국 기업의 빈자리를 한국 등 다른 나라 기업이 메운다며 이런 '백필링'(backfilling)을 차단해야 한다고 미국 정부에 요구해왔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기업이 중국에 판매할 수 없는 장비를 외국 경쟁사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판매하고 있어 경쟁에서 불리하다면서 한국과 대만 등 동맹도 미국과 같은 품목을 같은 방식으로 수출을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난 1월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에 제출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의 성장을 막으려는 미국 기업의 입김이 미국 정부의 정책에 반영된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다.
정부는 한국 장비업체의 경쟁력은 그 장비를 구매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비용 경쟁력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대중국 수출통제를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특히 중국 화웨이가 첨단반도체를 탑재한 신형 스마트폰을 출시한 것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범용(legacy)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장비까지 통제하려고 할 경우 한국 반도체산업이 받는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다만 수출통제를 통해 중국 반도체산업의 성장을 억제하면 중국의 추격을 뿌리쳐야 하는 한국 기업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런 부분을 고민하는 가운데 정부는 미국 주도의 다자 수출통제체제에 참여해야 할 때를 대비해 관련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은 법규상 국제조약이나 국제기구를 통해 가입한 국제 수출통제체제에만 참여할 수 있었고, 이는 정부가 미국의 압박을 방어할 때 사용한 논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은 최근 수출통제 근거 법률인 대외무역법을 개정해 향후 미국 주도의 다자 수출통제체제에 참여할 수도 있는 길을 열었다.
기존 대외무역법은 바세나르(WA), 핵공급국그룹(NSG),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호주그룹(AG) 등 대통령령으로 지정한 7개 국제 수출통제체제에서 지정한 전략물자만 수출통제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지난달 2월에 개정된 대외무역법은 전략물자의 정의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국제 수출통제체제"라는 문구 뒤에 "또는 이에 준하는 다자간 수출통제 공조에 따라 수출 허가 등 제한이 필요한 물품 등"이라는 조항을 새로 삽입했다.
정부는 대외무역법 개정에 대해 일단 러시아를 염두에 뒀다는 입장이다.
그간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려면 동맹국 중심의 새로운 다자 수출통제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군사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품목과 기술을 통제하는 바세나르체제는 전원 합의로 운영되는데 러시아도 회원이라 바세나르체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미국은 중국에 대해서도 반도체, 퀀텀,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을 보유한 동맹국들이 별도의 수출통제체제를 운영해야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미국 측은 한국 정부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안팎에는 미중 기술 경쟁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 요인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고 반도체산업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장비 수출통제 참여는 어떤 방식으로 하든 시간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여한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위원은 연합뉴스에 "미중관계와 지정학적 요인을 고려할 때 한국이 아예 빠지기는 어려워 보인다"면서 "다만 정부가 우리 중소중견기업에 가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미국과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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