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혼합현실 헤드셋‘비전 프로’를 착용한 모습. [애플 제공]
혼합현실 헤드셋 ‘비전 프로’. [애플 제공]
‘비전 프로’ 전면부와 후면의 밴드. [애플 제공]
애플의 혼합현실(Mixed Reality·MR) 헤드셋 ‘비전 프로’가 이르면 이달부터 미국에서 정식 판매를 시작한다. 지난해 6월 개발자회의(WWDC23)에서 첫선을 보인 지 약 6개월 만이다.
비전 프로는 애플이 2015년 4월 출시한 스마트워치 ‘애플워치’ 이후 8년여 만에 선보인 주요 제품군이란 점에서 주목받았다. 3,499달러(약 454만 원)라는 고가는 세상을 더 놀라게 했다. 공개 후 반년이나 더 채비 시간을 가진 비전 프로가 소비자들로부터 얼마나 큰 호응을 받을지는 새해 테크업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흥행에 대한 시장의 전망은 엇갈린다. 일단 비전 프로 출시로 가상현실(Virtual Reality)·증강현실(Augmented Reality)·혼합현실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올해야말로 ‘메타버스(Metaverse·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융합·복합)의 원년’이 될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콘텐츠 부족, 가격 등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 시장 절반 차지한 메타도 발 빼... ‘메타버스’ 관심 뚝
지금까지 VR·AR 시장을 장악해 온 건 메타다. 메타는 2014년 VR 기기 업체 오큘러스를 인수한 뒤 줄곧 이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유지해 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업체에서 메타버스 선도 기업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각오로 2021년 사명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전격 교체하기도 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메타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기준 약 49% 정도다. 시장에서 판매된 VR·AR 기기 2대 중 1대가 메타 제품이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메타의 기대와는 달리, VR·AR 기기 시장은 좀처럼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서카나데이터는 작년 11월 25일 기준 미국의 VR 헤드셋·AR 안경 시장 규모가 6억6,400만 달러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11억 달러였던 2021년 11월 25일까지보다 약 40%나 감소한 것이다.
지난해 시장이 유독 부진했던 건 인공지능(AI)의 부상 탓으로 분석된다. 챗GPT 열풍에 힘입어 테크업계의 모든 관심이 AI에 쏠렸고, 그 여파로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이에 따라 메타버스에 대규모 투자를 해 왔던 메타도 전략을 수정했다. 메타버스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고, 담당 직원 상당수를 해고했다. 메타버스에 올인하다시피 하던 메타마저 발을 빼니, 이 시장에 대한 관심은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비전 프로는 이처럼 시장이 쪼그라든 시점에 나오는 것이다.
■ 애플 “비전 프로는 최초의 공간 컴퓨터”
애플 역시 유리하지 않은 시장 상황을 의식한 듯, 지난해 6월 제품 공개 당시 ‘메타버스’란 말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공간 컴퓨팅’이란 용어로 제품을 소개했다. 아예 새로운 혁신 제품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읽혔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비전 프로를 “최초의 공간 컴퓨터”라고 규정하면서, 맥(컴퓨터)과 아이폰(스마트폰)을 잇는 차세대 컴퓨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컴퓨터는 마우스와 키보드로, 스마트폰은 디스플레이 터치로 각각 작동시키는 것과 달리 비전 프로는 그저 이용자의 눈과 음성, 손의 움직임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비전 프로는 제품 자체도 기존 VR·AR 헤드셋과는 여러 측면에서 차별화했다. 기본적으로는 다른 헤드셋처럼 눈을 완전히 뒤덮는 형태지만, 애플 특유의 단순하고 유려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언뜻 스키 고글을 연상시킨다. 제품은 디스플레이를 포함하는 전면부와 후면의 밴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면부의 바깥쪽엔 5개의 센서와 12개의 카메라를, 안쪽엔 2,300만 픽셀의 마이크로 OLED 디스플레이 2개를 각각 탑재했다.
이용자가 눈앞의 콘텐츠에 집중할 땐 기기 겉면이 불투명해지고, 다른 사람이 이용자 가까이 다가오면 안경처럼 투명해지는 게 비전 프로의 특징이다. 가상세계와 현실을 자연스럽게 넘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능이다. 다른 애플 제품과 연동된다는 점도 비전 프로의 장점으로 꼽힌다. 가령 아이폰으로 영상통화(페이스타임)가 걸려 오면 비전 프로로 받아 통화할 수 있고, 노트북인 맥북의 화면을 비전 프로 내부로 불러올 수도 있다.
■ 애플 이름값, 침체된 VR·AR 시장서도 통할까
업계에선 비전 프로가 이용자들 충성도가 높은 애플의 신제품이란 점에서 침체된 VR·AR 시장을 반등시킬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애플이란 이름값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수요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미국 CNN방송은 “시장의 회의론이 틀렸다고 입증할 수 있는 기업이 있다면 그건 애플”이라며 “방대한 이용자 기반이 있는 애플의 진입이 헤드셋 업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전했다.
시장조사업체 IDC도 올해 VR·AR 시장이 지난해보다 47%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결정적 이유로는 ‘비전 프로 출시’를 꼽았다. “애플의 진출이 시장에 많은 관심을 가져오고, 다른 기업들도 이 시장에서 경쟁하도록 강요할 것”이라는 게 IDC의 설명이다.
문제는 비싼 가격과 콘텐츠 부족, 작은 배터리 용량 등이다. 3,499달러인 비전 프로의 판매가는 499달러인 메타의 최신형 VR 헤드셋 ‘퀘스트3’보다 7배나 비싼 가격이다. 아이폰을 4대나 살 수 있는 가격이기도 하다. 웬만한 애플 마니아도 선뜻 지갑을 열기는 힘든 액수다. 너무 비싼 가격이 비전 프로 판매 확대에 최대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비전 프로로 즐길 만한 콘텐츠가 다양하지 않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VR·AR은 상거래, 여행, 교육, 건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여전히 콘텐츠의 대다수는 게임에 집중돼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각종 애플리케이션(앱)을 실행해 원하는 거의 모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느냐가 비전 프로 대중화에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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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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