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쏘우
▶ 동진 스님 / SAC 영화사 주지
본격적인 레이니시즌이 다가왔다. 겨울폭풍이 다 지나가기 까지, 치러내야 할 일들을 미리 단단히 단속해두어야 한다. 드레인, 거터, 스위밍풀, 드립라인, 타이머, 나무 전지, 물꼬 터주기, 수많은 낙엽 치우기...이것은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일이며, 이번 겨울에만 비롯될 일도 아니며, 이곳에 살고 있는 한, 쭉 지속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중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은 바람 거세지면 여지없이 다운되는 서킷 브레이커이다. 정전이 되면 모든 일상이 멈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냉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가만히 서 있게 되면, 아, 이런거지, 벼락처럼 다시 되뇌이게 되는 말이 있다. '이렇게 갑자기 어느날, 가는 거다. 가야할 때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겨울엔 마치 그리운 사람 그리워하듯이,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씨쏘우 같이 반복되는 삶이지만, 날마다 똑같이 밥먹는 일을 아무도 싫증내지 않고 날마다 처음 먹듯이 먹는 거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씨쏘우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본, 일을 또 보며 그렇게 속절없이, 그런 것이다. 어느날 그 씨쏘우가 멈추고 더이상 봤던 일도 다시 볼 일도 없어지게 될 때가 온다. 그것은 이 겨울의 정전 같은 그런 일이다. 그 죽음이 당연한듯 느껴지면 참 좋은데, 단조로운 씨쏘우도 편한 습이 되면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전쟁터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사람들이 보면, 생사가 늘 목전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병상에서 죽어가며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보면, 너무나 갖고싶을 이 일상들이, 정말로 괴로운 사람들도 있다. 각자의 괴로움은 그 어떤게 더 괴롭고 덜 괴롭다고 타인이 평가할 수 없다. 그 각자에겐 각자 기준의 극한의 괴로움이 존재하고, 사람마다가 다 다르듯, 각자의 고통은 유일하며 비교 문제가 아니다.
세계 자살률 1위라는 대한민국 자살자가 지금 저 전쟁 속에 있는 이들보다 덜 고통스럽다고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괴로움의 크기, 그 가늠할 수 없는 것을 두고 평균치로 평가할 수는 없다. 누가 감히 타인의 고통을 헤아려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최근 우연히 존엄사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는 사지마비 환자이다. 모든 가족과 지인들이 눈물로 막지만, 그는 결국 스위스에 있는 존엄사 시설에 가서 죽는다.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을 돌보며 지쳐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서 지속되는 삶이 너무 괴로워서다. 몸이 조금씩 더 나빠지다가 결국은 의식까지 잠식될 걸 알아서, 의식이 맑을 때, 스스로 존엄사를 선택하고 싶어한다. 아다시피 사랑하던 사람이 죽는 게 싫은 건, 그를 위한 것 같지만, 실은, 비정하게도 그자신들의 사랑을 잃는게 싫은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그 허무한 애정에다가 자신의 삶을 걸 순 없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고 삶도 죽음도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극악한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근래 노령 인구가 늘고,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식물화 된 삶을 지속하는 이들의 문제가, 물 밑에서 수면 위로 급속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처우를 사회가 버거워하는 게 너무 잘 보인다. 나이 먹어가는 입장에서 남의 일 같지 않다. 늙고 병듦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죽어가는 존엄한 과정을 외면하고 경시하는 휴머니즘의 부재이며,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런 일에 조금도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 있는 것이다.
해서, 정신 맑을 때 결정해두지 않으면 존엄한 죽음은 없다. 존엄하게 살 권리도 있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만약 타인이 결정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삼자에게도 지울 수 없는 고통이다. 서킷 브레이커처럼 그렇게 셧 다운. 나는 장차 스스로 씨쏘우에서 내릴 수 있길 바란다. 최근 종교계 인사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신도가 물어왔다. 불자의 자살은 안되는거 아니냐고. 안된다,가 부처님 법 어디 나오는지 나는 모른다. 안되는 거 아니냐는 이는, 안된다는 법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나는, 가야할 때가 있고, 그 때가 되면 기꺼이 가야 한다는 걸 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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