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빅테크 HBM 수급전쟁
▶ AI 성능 고도화 따라 수요 확대, 내년 생산 2배 늘릴 계획이지만 기존 메모리 업체들 적자·감산
장비 부족에 후공정 ‘병목현상’…공급자 우위 속 단가 인상 전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등 주요 메모리 업체들이 내년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량을 2배 이상 확대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고 증설 작업에 한창이다. 삼성전자의 웨이퍼 기준 HBM 월간 생산능력은 올해 1만3,000장에서 내년 3만1,000장, 2,025년에는 4만8,000장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 생산물량도 올해 1만3,000장에서 내년 2만8,000장, 2025년 4만4,000장 등 비슷한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천안·온양 패키징 라인을 중심으로, SK하이닉스는 낸드 제조가 주력인 청주 공장 일부를 개조해 HBM 제조 핵심 공정인 실리콘관통전극(TSV)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
공격적인 투자에도 HBM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하는 것은 수요 증가 요인이 공급 곡선을 추월하기 때문이다. 세계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는 엔비디아는 올 8월 HBM3E를 탑재한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GH200 그레이스 호퍼 슈퍼칩’을 공개하며 이 제품을 내년 2분기에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 1,200만개 수준이던 엔비디아의 HBM 수요량은 내년 2,400만개로 2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엔비디아의 독주를 막기 위해 자체 AI 칩을 개발하고 있는 구글과 아마존웹서비스(AWS), 메타 등 HBM을 필요로 하는 잠재 고객사도 빠르게 늘고 있다. 구글은 올 8월 자체 개발 AI 반도체인 텐서처리장치(TPU) ‘v5e’를 공개했다. 아마존 역시 클라우드 계열사인 AWS를 통해 인퍼런시아(추론용), 트레이니움(학습용) 등 자체 칩을 활발히 개발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HBM 제조사가 엔비디아·AMD 등 AI용 GPU 제조사로 한정됐지만 자체 개발 AI 칩 상용화가 이뤄진다면 공급처가 대폭 확대될 수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빅테크 사이에서 HBM 수급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급 제한 요인도 개선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HBM을 만들기 위한 핵심 후공정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일례로 GPU와 HBM을 기판 위에 올려 한 개 칩처럼 만드는 대만 TSMC의 2.5D 패키징 공법 칩온웨이퍼온서브스트레이트(CoWos)는 내년 2배 증설이 확정된 상황에서도 18개월 이상 공급 부족이 점쳐지고 있다. 일부 HBM 장비의 경우 공급처가 1~2개로 한정돼 단번에 물량이 늘어나기도 어려운 구조다. HBM 대량생산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산공정 전반적으로 수율도 높지 않다.
주요 메모리 업체들의 타이트한 자금 여력도 고려 대상이다. 씨티그룹은 내년 글로벌 D램 시설투자(CAPEX) 전망치를 기존 30%에서 7%대로 조정했다. 메모리 사업 적자와 감산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무리한 투자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논리다.
이세철 씨티글로벌마켓증권 전무는 “AI를 중심으로 메모리반도체에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됐지만 기존 메모리 제품들의 약세, 감산 등이 지속되며 공격적인 투자를 하기에는 어려운 여건”이라며 “이에 따라 타이트한 공급이 지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HBM 시장에서 공급자 우위가 지속된다면 메모리 제조사들은 당분간 단가와 판매량을 동시에 끌어올리며 이익 극대화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3대 D램 기업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은 모두 5세대 HBM 제품인 ‘HBM3E’ 개발을 완료하고 샘플 공급을 시작하면서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생성형AI 서버에 탑재되는 HBM 가격은 기존 메모리보다 6배 이상 높다. 이에 따라 전체 D램 매출에서 HBM이 차지하는 비중도 올해 한 자릿수에서 내년 20%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HBM 공급 부족이 메모리 사업 체질을 바꿀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기존 메모리반도체 사업은 소품종 대량생산에 범용 제품이 주를 이뤄 시황에 따른 가격 영향이 컸지만 HBM은 메모리 기술력과 후공정이 모두 결합한 수주형 사업의 형태를 띤다. 빅테크 기업들의 AI 성능 고도화에 따라 메모리반도체에 요구되는 성능도 급격히 다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메모리 제조사로서는 가격 협상력을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실적을 확보할 수 있다.
김운호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AI 모멘텀이 예상했던 수준을 상회하며 전체 D램 시장 전반에 대한 전망도 바뀌고 있다”며 “2024년부터 2026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반도체 업사이클 기간 중 D램의 역대 최대 매출 기록이 경신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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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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