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잃어버린 30년’ 탈출할까
▶ 주가·부동산 30여년만에 최고치… 실물 경제도 호조
국가부채, 고령화, 제조업 공동화 등 고질병에 성장 한계 “디플레이션 탈출해도 1980년대 영광 되찾기 힘들어”
한국도 더 늦기 전 재정 투입해 신성장동력 점화해야
올 7월 28일 일본 금융시장은 하루 종일 요동쳤다. 일본은행(BOJ)은 이날 오후 2시28분쯤 양적완화의 주요 수단인 ‘수익률곡선제어(YCC)’ 정책에서 장기 금리가 상한인 0.5%를 초과해도 용인하고 무제한 국채 매입도 금리가 연 1%를 넘어설 때만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BOJ는 그동안 국채 10년물 금리가 연 0.5%를 넘으면 국채를 대량 매입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경기를 부양해왔다.
BOJ 발표 직후 주가·환율·국채 금리는 방향성을 잃고 각각 제멋대로 움직였다. 닛케이225지수는 약간 오르더니 곧장 전일 대비 2.6% 급락했다가 0.4% 하락으로 마감했다. 엔·달러 환율 역시 급락했다가 안정세를 찾았다. 반면 10년물 국채 금리는 전날보다 0.126%포인트 급등한 0.572%로 마감하며 2014년 9월 0.582% 이후 9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BOJ 결정을 놓고 시장 해석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증시와 외환시장은 ‘명목 국채금리 1%는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여전히 마이너스 금리’라는 점에 주목해 양적완화 지속으로 해석했다. 반면 국채시장은 ‘금리 상단 상향 조정’에 대해 긴축의 전(前) 단계로 받아들였다. 이 같은 시장의 혼란은 일본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주식·부동산 시장, 기업 실적이나 실물경제 지표만 놓고 보면 ‘잃어버린 30년’에서 이미 탈출한 모습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디플레이션 심리,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나 저출산·고령화 등 고질적인 문제점을 감안하면 장기 불황 탈피가 쉽지 않다는 분석도 많다. 일본 경제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일본 닛케이225 주가지수는 금융 완화 정책과 엔저, 도쿄거래소의 주주 환원 정책 등에 힘입어 1990년 버블 붕괴 이후 3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연초 대비 상승률은 1일 현재 29.6%에 이른다. 주요국 가운데 상승률 1위다. 부동산 시장도 달아오르고 있다. 최근 일본의 민간 시장조사 업체 부동산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도쿄 도심인 23구의 올해 상반기 신축 아파트 가격은 1억 2,962만 엔(약 11억 8000만 원)으로 1991년 당시 가격(9738만 엔)을 32년 만에 경신했다.
일본 기업들도 부활하고 있다. SMBC닛코증권이 상장기업 1309곳(금융업 제외)의 2022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실적 추정치를 집계한 결과 순이익은 역대 최대였던 지난 회계연도의 약 34조 엔(약 337조 원)을 약간 웃돌 것으로 예상됐다. 장기 불황을 거치며 부실 사업 정리, 신사업 진출 등 구조 조정과 체질 개선에 성공한 덕분이다.
실물경제 지표도 개선 추세를 보이면서 디플레이션 탈출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올해 1분기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7%(연율 기준 2.7%)를 기록했다. 최근 블룸버그가 전문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본의 GDP 성장률 평균 전망치는 올해 1.2%, 내년 1.1%였다. 이는 러시아를 포함한 주요 8개국(G8) 가운데 1~2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2021년과 2022년 성장률은 각각 2.1%, 1.1%였다.
예상대로 된다면 2004~2007년 이후 처음으로 4년 연속 1% 이상의 성장률을 달성하게 된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6월 3.3%로 지난해 4월 이후 15개월 동안이나 BOJ 목표치 2%를 웃돌고 있다. 같은 달 실업률은 2.5%로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일본 경제가 기업과 인력 구조 조정 등을 거치면서 구조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며 “장기 디플레이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GDP에서 민간소비와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74%에 달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수출 비중이 낮아 글로벌 경기가 부진하더라도 내수 기반으로 성장을 이어갈 수 있는 구조다. 2021년 10월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소비 확대에 따른 물가 상승과 투자 확대에 기반해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한 ‘새로운 자본주의’를 들고나온 이유다.
이 교수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아베노믹스’가 재정 풀기와 금융 완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기시다 총리는 물가와 임금 상승을 유도해 소비를 자극하고 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이끌어내겠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4월 소매 판매액은 전년 동월 대비 5.1% 늘어나 14개월 연속 증가했다. 올해 일본 기업의 총임금 인상률은 전년 대비 3.58%로 1993년 3.9% 이래 가장 높다.
미중 갈등도 일본이 첨단산업의 기지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기 위해 신성장 산업 분야에서 독일·일본·한국 등 우방국과의 기술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올 5월 미국과 일본이 최첨단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로드맵을 수립하기로 한 게 단적인 사례다. 스위스 픽테트은행의 동 첸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망 재편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목적지 중 하나로 주목 받고 있다”며 “특히 일본이 반도체와 같은 고기술 첨단 분야에서 수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도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살리기 위해 정부와 힘을 합치고 있다. 일본 최대 기업 단체인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은 올해 초 “임금 인상은 사회적 책무”라며 임금 인상을 독려했다. 사공목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올 들어 민·관이 힘을 합쳐 사무라이 정신으로 사활을 걸고 덤비는 것은 분명하다”며 “장비·소재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는 일본의 저력을 가볍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 경제에 온기가 돌고 있지만 아직 낙관론은 이르다는 분석이 더 많다. 경기 사이클상 일시적 반등에 불과하고 앞으로 고질적인 문제들에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재임 때인 2003~2007년, 아베 총리 재임 때인 2013~2018년에도 일본 경제 부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증시가 상승한 적이 있다. 당면한 리스크는 디플레이션 탈출의 핵심 과제인 물가 상승세가 내년에는 꺾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최근 물가 상승은 수요 측면이 아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저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 탓이 크기 때문이다. BOJ도 신선 제품을 제외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해 2.5%에서 내년 1.9%, 내후년 1.6%로 점차 하락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소비자들의 뿌리 깊은 디플레이션 심리도 물가 상승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비용 상승 부담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지 못해 수익성이 악화된 기업들의 도산이 속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 이후에는 대폭의 임금 임상을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손영환 국제금융센터 전문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일본 기업들이 올해의 높은 임금 인상에 대해 물가 급등과 정부의 강한 요청에 따른 특별한 경우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제조업 공동화도 일본 경제의 걸림돌이다. 과거 일본 기업들은 첨단 공정과 기술 개발 기능만 남기고 생산기지를 해외로 대거 이전하는 전략을 추진해왔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자기자본이 1억 엔 이상인 기업 857개 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 기업들의 2023 회계연도 자본 투자액은 31조 6000억 엔(2210억 3000만 달러)으로 사상 최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해외투자 증가율은 전년 대비 22.6%로 국내의 2배에 달한다. 기업 실적 호조가 설비투자, 임금 상승 등 국민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장 큰 문제는 천문학적 규모의 국가부채, 고령화·저출산 등의 여파로 일본 경제의 회복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일본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63%로 미국(123%)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 선진국 중 가장 높다. 비록 BOJ가 일본 국채의 52%가량을 매입하고 있고 일본인들의 저축률이 높아 외국인 자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지속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금처럼 재정을 퍼붓는 정책은 언젠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또 막대한 국채 이자 지급 부담에 기준금리를 올리기도 힘들다. 재정·금리 정책의 손발이 묶여 있어 신속한 경기 대응이 어렵다는 얘기다.
고령화는 소비를 둔화시키고 재정 부담을 늘리는 것은 물론 혁신을 통한 성장 잠재력 확충을 가로막고 있다. 일본 정부는 디지털화·그린화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겠다지만 이를 뒷받침할 젊은 인재 자체가 부족한 실정이다. 결국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에서 탈출하더라도 1970~1980년대 미국을 위협하던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umber one)’ 영광은 재연하기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본 사례는 한 나라 경제가 한 번 무너질 경우 회복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한국 역시 중국발 특수에 취해 있다가 산업구조 전환이 늦어지면서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문제는 저출산·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저성장이 고착화하기 전에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면서도 신성장 동력으로 떠오르는 미래 산업 지원을 위해 정부가 재정을 과감히 투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제 혜택과 규제 혁파 등을 통해 해외로 나간 국내 기업들을 복귀시키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지금 반도체·배터리 전쟁에서 보듯이 산업·과학기술 정책은 기업 차원이 아닌 국가 간 경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벤처 육성, 건전한 자본시장 생태계 조성 등을 통해 하루빨리 중장기 성장세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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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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