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자력의 현재와 미래
▶ 방사선 활용 R&D로 저성장 늪 벗어날 동력 키워야…우주발사체·위성·자율차 관련 내방사선 반도체 연구
방사선으로 화합물 구조 바꿔 개량신약·백신도 개발…원전 해체 시장 500조원대 전망, MSR도 유망 분야
원자력발전 연구를 주도하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은 미래 성장 동력 창출을 위한 별동대를 두고 있다. 방사선 연구를 통해 첨단산업·바이오헬스·농업·국방 분야 등의 첨단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첨단방사선연구소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을 확충하기 위한 대표적인 연구 기관이다.
26일 대전 본원을 거쳐 찾은 전북 정읍시 신정동의 이 연구소는 28개의 연구동에서 100명 이상의 박사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먼저 방사선기기팹센터를 찾았다. 이곳은 우주·항공용 반도체 중 30%가량이 우주 방사선으로 인해 오작동이 난다는 점을 고려해 내(耐)방사선 반도체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우주 방사선의 85%인 양성자가 대기권과 충돌해 중성자·감마 등 2차 방사선을 내뿜는 환경과 비슷한 조건을 마련해 연구한다. 이를 통해 우주 발사체 또는 위성의 고장과 자율 주행차의 급발진을 감소시키려고 한다. 내방사선 반도체의 선도국인 미국과 유럽이 이 분야에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게 이 때문이다.
미국 샌디아국립연구소는 항공우주국(NASA·나사)과 공동으로 실리콘 기반의 내방사선 반도체 연구를 하고 있다. 독일 라이니츠연구소는 실리콘게르마늄 화합물 반도체를 기반으로 내방사선 연구를 한다. 국내에서도 늦기는 했지만 반도체 강국의 강점을 살려 5년 내 우주용 반도체의 핵심 소자를 개발할 계획이다.
방사선으로 특정 화합물의 구조를 변환시키는 개량 신약도 개발하고 있었다. 기존의 산·염기 처리 공정 대신 방사선 라디칼 반응을 통해 화합물 구조를 바꿔 바이오헬스의 패러다임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아직 방사선 개량 신약 분야는 걸음마 단계이지만 우리가 주도적으로 기초·기반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게 연구소의 설명이다. 이르면 3년 내 국내 1호 방사선 개량 신약 후보 물질을 발굴해 산업화를 진행한다는 목표다.
방사선의 정밀 분석 기능과 인공지능(AI) 기술을 융합해 감염병 대응 백신 개발도 시도하고 있다. 사독 백신은 방사선 조사를 통해 부작용을 저감하고 생균 백신은 신속하게 약독화 백신을 내놓고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은 AI 합성 실험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현재 방사선 백신은 미국·유럽 등에서 임상 2상에 진입했으며 국내에서는 동물 임상을 하는 단계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올해 감염병 예측 공동 연구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중심으로 이 센터를 지정한 것도 잠재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사선 기술의 변화를 보면 시행착오도 많았다는 점에서 장밋빛 전망만 할 수는 없다. 1세대 방사선 기술은 의료용품·농산물·식품 멸균과 타이어·전선 가교 강화에 쓰이며 실용성을 확보했다. 문제는 2세대 들어 뚜렷한 목표 없이 성급하게 바이오·환경·나노 기술과의 융합만을 시도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방사선 메커니즘 연구의 미비로 연구 확장성에서 한계를 보인 것이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3세대 방사선 연구는 특화형 방사선 융합 기술로 대체 불가의 방사선 강점 기술로 나아가고 있다.
전고체 2차전지와 고성능 전력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개량 신약·백신 등 바이오헬스, 내방사선 반도체 회로 설계와 방사선 반응 지도 데이터 플랫폼 등 정보기술(IT) 분야 등의 연구를 예로 들 수 있다. 배형우 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방사선 연구의 산업화를 위해 산재된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빅데이터를 구축했다”며 “기업이 원하는 맞춤형 방사선 예측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방사선 반응 모델링 플랫폼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방사선 분야 외 원자력발전에서도 소형모듈원전(SMR)과 해체 산업 등이 미래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SMR은 대형 원전에 비해 안전성과 경제성을 높인 500㎿ 이하의 소형 원전이다. 석탄 화력발전소 하나를 대체해 25만 가구가 온실가스 배출 없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2008년 설립한 테라파워의 경우 핵분열로 발생한 열을 물이 아닌 나트륨으로 냉각해 오염수가 발생하지 않고 외부 전원 없이 자연 냉각이 가능하며 6각형 핵연료 다발로 원자로의 크기를 대폭 줄였다.
2011년 폭발해 지금도 방사능 오염수 배출 이슈로 논란이 되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과는 근본적으로 구조가 다르다. 테라파워는 미국 에너지부에서 약 20억 달러를 지원받아 2030년까지 와이오밍주에 345㎿ 규모의 실증 원자로를 건설한다는 목표다.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CEO)는 “풍부한 원전 경험을 가진 한국과의 협력 기회가 많을 것”이라며 “SK·HD현대 등에서 투자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시중 원전보다 1000배 정도 안전성을 높인 혁신형 소형모듈원전(i-SMR) 개발에 나서고 있다. 건설 비용·기간 측면에서 유리해 석탄 화력발전소를 대체할 수 있는 데다 사고가 나더라도 주민들이 대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올해 초 경주시를 SMR 국가산업단지 최종 후보지로 선정해 2030년까지 3500억 원을 지원해 150만 ㎡ 규모로 조성하기로 했다.
2030년대에는 대형 선박의 디젤엔진에서 내뿜는 어마어마한 온실가스도 원전을 통해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10만 톤급 컨테이너선의 경우 하루 기름 값만 1억 원가량이 드는데 큰 폭의 비용 절감을 꾀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디젤엔진에서 탈피해 고온으로 녹인 용융염과 핵연료 물질을 섞어 사용하는 액체연료 원자로인 용융염원전(MSR)으로 전환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현재 원자력연구원, 대형 해운사, 한국선급 등이 손을 맞잡고 연구개발(R&D)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원전 해체 시장도 떠오르고 있다. 전 세계 600여 기의 원전 가운데 해체된 원전은 미국·독일·일본·스위스 등의 원전 21기에 불과하다. 미국 컨설팅사 베이츠화이트에 따르면 세계 원전 해체 시장 규모는 2050년쯤 500조 원대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는 2017년 6월 영구 정지된 고리 1호기에 대한 해체 계획서를 심사 중이다. 보통 원전 해체에는 15년가량이 걸리고 전체 해체 비용으로는 건설 비용의 40% 가까이가 소요된다. 주한규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은 “원자력은 기후 위기에 대비해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저감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자 미래 성장 동력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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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본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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