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갤릭호 항해에서부터 역사적 태평양 요트 횡단까지
▶ 102명 이민 선조들 땀과 눈물로 점철된 항해, 하와이-샌프란시스코-LA 거쳐 ‘디아스포라’
인천시 중구 한국이민사박물관에 1903∼1905년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온 한인 초기 이민자 7,000여명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설치돼 있다. [연합]
계묘(癸卯)년인 올해는 미주 한인 이민 역사의 새로운 신화가 쓰여진 해로 기록될 것이다. 역시 계묘년이었던 1903년 1월13일, 첫 이민 선조들이 하와이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2023년 6월4일, 120년 전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 선조들의 항해길을 거슬러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들의 고난과 희망의 여정을 되새기고 기억하기 위한 태평양 요트 횡단 대장정이 성공적으로 완수됐다. 한국일보 미주본사는 한인 이민 1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갤릭호 항해의 길을 다시 밟는 미주 한인요트클럽 남진우 회장의 항해팀을 단독 후원하며 그들의 대장정과 함께 했다.
제물포에서 하와이까지, 새로운 이민길을 개척한 한인 이민 선조들의 이민사는 바로 파란과 질곡의 가시밭길과 감격과 환희의 길을 걸으며 써온 드라마틱한 불멸의 대서사였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올해 LA에서 하와이를 거쳐 다시 인천까지, 이민 선조들의 길을 거슬러 나선 요트 원정대의 태평양 횡단 성공은 향후 100년을 넘어 이어질 미래의 미주 한인사에 새로운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초기 한인 이민자의 갤릭호 항해에서부터 이번 태평양 요트 횡단 성공에 이르기까지 120년의 사이를 두고 펼쳐진 역사적 두 항해의 연결점과 의의를 정리해본다.
계묘년 새해가 밝았던 1903년 1월13일.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던 구한말 시절, 102명의 조선인들을 태운 미국 상선 ‘갤릭호’가 일본 나카사키항을 출발한지 11일 만에 호놀룰루항 외곽 샌드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1902년 12월22일 일본 상선 겐카이마루호에 몸을 싣고 제물포항을 출발할 때만해도 121명이 승선했었으나 나카사키항에서 미국 이민당국의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19명이 하선했다.
샌드 아일랜드 정박 중 실시된 이민국 신체검사에서 16명은 입국이 끝내 거부됐다. 결국 남성 48명과 여성 16명, 어린 자녀 22명 등 86명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들 이민 선조 중 절반 가량은 미국 감리교 교단 선교사였던 아펜젤러가 제물포항 개항과 함께 1885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제물포 웨슬리메모리얼교회’(현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이었다. 2023년, 이민 120주년을 맞은 한인 이민사의 시발점이었다.
■ ‘이민 종가’ 하와이
1902년 12월부터 1905년 4월까지 2년여 동안 제물포에서 하와이로 떠난 조선인은 7,226명. 그런데 479명은 신체검사에 떨어져 되돌아갔기 때문에 실제로 하와이에 이주한 한인 수는 6,747명이었다.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하와이로 건너 온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으로 흩어져 주 6일 하루 10~16시간씩 고된 노동을 견뎌냈다.
같은 해 11월 미국 최초의 한인교회였던 한인감리교선교회(현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렸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역에 분립됐던 24개 단체가 통합해 독립운동단체인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했다.
1910년 연방 센서스에 따르면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이민자수는 4,533명이었다. 1905년 4월1일까지 하와이 땅을 밟은 한인 이민자가 6,747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5년 새 2,000명의 인구 감소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하와이 한인들 중에 1,000여명이 고된 노동과 낯선 이민생활을 견디지 못해 귀국했고, 1,000여명은 샌프란시스코와 LA 등 미국 본토 서부 연안으로 재이주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엔 한인들의 미국 이민이 억제됐다. 유일하게 주목할만한 이주는 1910년부터 미국에 들어 온 소위 ‘사진 신부(picture brides)’들이다. 1924년까지 951명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115명은 미국 서부 연안으로 들어왔다. 사진 신부의 도착은 한인 이민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사진 신부들 덕분에 가족이 형성됐고, 이에 따라 미국에서 출생한 한인 2세대가 출현하게 된다. 사진 신부들은 그 이전에 도착한 남편들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고, 계몽돼 있었다. 이들은 남편들을 설득해 플랜테이션 노동을 그만두게 하고 도시로 진출하게 만들었다. 도시로 진출한 한인들은 소규모 자영업이나 교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민자들의 정거장’ 샌프란시스코
1905년 2월 하와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대륙간 철도 노동자 모집이 시작됐다. 하와이에서 이주한 한인들을 포함해 미국 본토로 오는 거의 모든 한인들은 당시 ‘상항’이라고 불리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초기 한인 이민자들에게 ‘마음의 고향’이자 스탁튼과 프레즈노, LA, 덴버, 솔트레익 등 각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한인들의 정거장 역할을 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선 미 본토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최초의 한국어 신문 공립신보, 애국단체 대동보국회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대동보국회에는 대한제국 외교 고문이면서도 일본 편을 들었던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가 회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에서 1910년 사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샌프란스시코의 공립협회, 대동보국회가 통합해 해외 한인들의 연합회 성격인 대한인국민회와 기관지 신한민보가 결성됐다.
■ ‘이민자들의 종착역’ LA
LA에 형성된 첫 코리아타운은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다. 파차파 캠프는 도산 안창호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1905년부터 1913년까지 일궜던 커뮤니티다.
파차파 캠프는 지난 2000년 당시 UC리버사이드 한인 학생들이 고서를 모아 놓은 도서관에서 ‘한인 임시 거주지’라고 적힌 오래된 지도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908년 샌본 화재보험회사가 제작한 리버사이드 지도에는 코티지와 파차파 애비뉴 코너 3에이커 부지 주거지가 한인타운으로 선명하게 표기돼 있다.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중가주의 다뉴바, 리들리, 윌로우에 정착했던 한인들이 리버사이드로 몰려 들었다. 북가주와 중가주에서 일하던 철도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 너무 열악한 탓에 보다 더 나은 터전을 찾아 리버사이드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처럼 리버사이드는 한인 이민 120년사에 있어서 남가주 한인 이민자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300여명의 한인 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거주했는데 1913년 남가주에 들이닥친 한파로 오렌지 농사가 망하자 한인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파차파 캠프도 사라졌다. 일자리를 잃은 한인들이 클레어몬트와 LA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초기 한인 이민사를 논하는데 있어 도산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도산 안창호는 미국생활 12년 6개월 동안 반 이상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흥사단 조직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2년 부인 이혜련 여사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은 1904년 1월 리버사이드로 거처를 옮겼다. 1905년 도산은 파차파 한인회관에 노동주선소를 설립해 한인뿐 아니라 남미계 노동자들에게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덕망을 쌓아 갔다.
1909년 상해를 거쳐 한국에 돌아 갔다가 1911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은 1912년 리버사이드에서 흥사단 강령과 독립운동을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했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본부를 옮겨 온 대한인국민회는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잃은 미주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또 국가이자 무형의 정부였다.
1915년 역시 LA로 본부를 이전한 흥사단은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 후원과 일꾼 양성에 앞장 섰다. LA에 정착한 초기 이민자들은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 운영비를 댔으며, 악착같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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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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