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이승만 리 브라더스 회장 아메리칸 드림 성공신화 한국식품 세계화 선구자
11일 장례예배에 참석한 유가족들.
콜럼비아 버거로드 웨어 하우스에서 직접 개발한 쌀 옆에 앉아 있는 고 이승만 회장,
지난 6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 이승만 리 브라더스 회장은 미주 한인타운의 번영과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선두에서 이끌며 미주 한인사회를 빛낸 1세대 별로 ‘아메리칸 드림’의 산증인이자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반세기 한국식품 세계화에 전력
미주 한인경제계의 거목인 이 회장은 1938년 12월 28일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했다. 1960년 성균관대 정치학과 재학 중 발생한 4.19 혁명 당시 시위를 주도해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상한 그는 ROTC 1기를 거쳐 1968년 큰 정치가를 꿈꾸며 부인 이춘옥 씨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몇 가지의 사업이 실패한 후 한국에서 모친이 보내준 오징어를 팔아 큰 수익을 보자 1976년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서 식품도매업체인 리 브라더스를 창업했다. 고인은 ‘음식을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신념으로 반세기 가까이 동양식품 도매 및 소매업의 한길을 걸으면서 한국식품 세계화에 전력을 다했다. 그의 노력으로 미국은 물론 세계 어디서나 한인의 밥상에는 한식이 오를 수 있게 됐고, 누구나 한식을 맛볼 수 있게 됐다.
▷고속성장으로 성공신화 이뤄
이 회장은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리 브라더스를 키워나갔고, 이민 붐과 함께 동양식품시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리 브라더스는 1980년대 고속성장으로 지역 경제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 회장은 재래시장에서 팔리던 한국식품의 포장을 신식으로 바꾸고, 상표를 붙여 상품을 현대화했다. 이로 인해 한국식품이 미국시장은 물론 세계시장에서 선진국 식품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리 브라더스는 일본식품에 대적할 ‘아씨표’ 고유 브랜드화로 미국 동양식품업계의 대세가 됐다. 리 브라더스는 이후 한국미, 이천, 이씨네, 맛사랑, 하나, 황제 등 15개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한국을 비롯해 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의 다양한 인기 브랜드 320개를 취급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리 브라더스는 1989년 락빌에 첫 롯데 수퍼를 열면서 소매업에 진출했다. 이어 1991년 버지니아 페어팩스에 2호점 매장을 개업하고, 뉴욕은 물론 서부 LA까지 진출했다. 1999년 엘리콧시티에 롯데플라자 매장을 열면서 한인타운 형성을 견인했다. 이후 케이톤스빌, 락빌, 게이더스버그, 저먼타운, 실버스프링, 라그란데 등 7곳, 버지니아의 애난데일과 헌던, 애쉬번, 센터빌, 챈틸리 등 5곳 등 워싱턴 지역에만 12개의 롯데 매장을 열었다. 리 브라더스는 이름 그대로 이 회장의 4형제가 힘을 합쳐 경영했다. 첫째 동생 이승길 롯데플라자 사장은 직영소매점 롯데플라자들을 맡아 운영하다 승원무역을 설립해 독립했다.
▷글로벌업체로 식품 왕국 건설
글로벌업체로 도약한 리 브라더스는 250만 미주 한인은 물론 세계 160개국 한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동양식품을 공급하기 위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있다. 창업 35년 만에 국내외 5개의 계열사와 미국 내 11개 매장, 1,600개의 도매 어카운트, 4,000여개의 자체 브랜드로 명실상부한 ‘식품 왕국’을 건설했다. 리 브라더스는 2009년부터 2세 경영을 준비해 현재 차남인 이라빈 사장이 이끌고 있다.
▷불가능이란 없다
이 회장은 이민 1세에게는 한국인의 자부심을, 2세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롤모델이었다.
나폴레옹의 좌우명인 ‘불가능이란 없다’를 가장 좋아한다는 고인은 2004년 미국에서 꿈을 이룬 기업가들의 성공 스토리를 담고 있는 서적 ‘미국 재계를 움직이는 9명의 한국인들’에서 ‘미국 식품업계의 거상’으로 소개됐다. 또 같은 해 세계무역센터 인스티튜트(WTCI)가 선정한 제8회 국제 비즈니스 지도자상을 수상하고, 성균관대에서 ‘학교를 빛낸 해외 동문 기업인’에 선정돼 상을 받았다. 2009년에는 한국농수산식품 장관 표창도 받았다.
이 회장은 성공한 사업가로서 한인단체 지원 및 모교 장학금, 고국 수재민 돕기 등 사회환원에도 앞장섰다. 리 브라더스 창업 40주년을 맞은 2016년에는 워싱턴 한인커뮤니티센터 건립을 위해 1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교통사고로 건강 악화돼
이 회장은 지난 2017년 3월 집 앞 도로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후, 그 이듬해 잇따른 교통사고로 건강이 약해졌다. 2021년 골프장에서 일사병으로 의식을 잃으면서 급격히 쇠약해진 이 회장은 지난 6일 노환으로 별세, 11일 저녁 엘리콧시티 소재 벧엘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엄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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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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