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의 포도’에서 본 뱅크런의 역사
▶ 1720년 남해회사, 1819년 미국 버블 붕괴…1930년대 대공황,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은행 감독 체계·예금자보호제도 강화했지만 SVB, 크레디트스위스 등 뱅크런 사태 재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국가가 은행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 왕궁이나 사원이나 개인에게 돈을 빌린 사람은 나중에 추수한 보리로 갚기도 했다. 국가는 채무 관계를 증명하는 점토판을 발급했다. 상인이 농부나 무역업자에게 곡물을 대출해 주면서 은행업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기원전 2000년경 아시리아, 인도, 수메르에서 빈번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은 돈이나 귀중품을 보관해 주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전쟁 기간 자신의 재산을 신전에 맡겼다. 신전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 몰래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불가능했고, 신성한 장소에서 도둑질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종교적 믿음이 있었다.
중세 십자군전쟁은 이탈리아가 교역의 중심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 나라 돈이 이탈리아로 몰렸고, 유대인 대부업자가 환전상 역할을 수행했다. 대부업자는 기다란 탁자에 각국 화폐를 올려놓고 돈을 교환했다. 이때 사용된 탁자의 이름이 ‘방카(banca)’였다. 훗날 현대 은행을 의미하는 ‘뱅크(bank)’가 된다. 믿음의 상징인 은행이 파산 위기에 놓이면 예금주들은 은행으로 달려가 대규모 예금 인출(Bank Runㆍ뱅크런)을 한다. 뱅크런의 역사를 살펴보자.
1656년 요한 팜스트루흐는 스웨덴 국왕에게 스톡홀름은행 설립 허가를 받는다. 이후 잘나가다 불과 몇 년 사이 대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발행한 지폐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664년에 은행은 빗발치는 고객의 예금 인출 요구(뱅크런)에도 돈을 돌려줄 수 없어 영업을 중단한다. 팜스트루흐는 투옥되고 왕실은 은행을 인수하고 의회가 운영하게 된다.
1711년 설립된 영국 남해회사는 아프리카 노예를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수송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설립된 무역회사였다. 당시 재무장관은 남해회사를 설립하면서 정부의 부실채권을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했다. 무역으로 이윤을 창출하면 부실채권을 정리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정부 계획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남해회사는 1719년 막대한 금액의 주식발행 권한을 얻어내 금융회사로 변신한다. 1720년에 남해회사 주가는 천정부지로 올랐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투기열풍에 휩쓸렸다. 아이작 뉴턴은 7,000파운드를 벌었지만, 이후 주가폭락으로 2만 파운드나 손해 봤다. 작곡가 프리드리히 헨델은 큰 이익을 보고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해 자신의 음악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남해회사 거품 붕괴의 영향은 은행으로 이어졌다. 영란은행은 고객에게 남해회사 채권을 400파운드에 소화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뱅크런 사태가 벌어지자 영란은행은 묘수를 찾았다. 친분 있는 지인을 인출 행렬 맨 앞에 세웠다. 인출금을 6펜스짜리 주화로 천천히 지급해 줬다. 인출에 성공한 이들은 받은 돈을 들고 은행 뒷문으로 들어가 다시 예금했다. 영란은행은 이 수법으로 인출쇄도를 버텨냈고 신뢰를 회복해 영업을 재개했다.
1819년은 미국 경제사에 중요한 해이다. 버블 붕괴로 대규모 공황급 경기 침체가 발생한 해였다. 미국 각지의 은행이 대출을 증가시켜 경제 살리기 노력을 했으나 과도한 대출 증가와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경기 침체로 은행이 파산해 예금인출이 폭증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도 은행 파산과 뱅크런의 역사는 되풀이되었다. 특히 은행 감독과 규제의 미흡, 은행 예금 보호 제도 부재라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대공황을 계기로 많은 국가가 은행 감독 체제를 강화하고 예금자보호제도를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제도는 충분하지 않고 시장은 탐욕의 역사를 되풀이하는가 보다.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와 같은 대규모 금융기관이 파산하자 뱅크런이 발생했고, 금융규제와 안정성 강화가 더욱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유럽 재정 위기 상황에서 그리스는 구제금융 협상 난항으로 채무불이행과 유로존 탈퇴 우려가 높아지자 하루에만 1조9,000억 유로의 예금이 빠져나가는 뱅크런이 발생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에 긴급유동성 지원액 한도를 연일 증액시켜 뱅크런 사태의 전염을 막았다.
뱅크런은 단지 해당 은행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금융기관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뱅크런으로 인한 한 은행의 위기는 다른 금융기관에 악영향을 미쳐 금융시스템 전체 위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면 실물경제도 혼란에 빠진다. 뱅크런으로 인한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최후에는 중앙은행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금융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발권력(화폐 발행)을 동원해 금융시장에 일시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기능을 최종대부자 기능이라 한다. 금융당국은 뱅크런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예금보호제도를 도입했지만, 전액 보장이 아니라 전체 예금자를 보호하지는 못해 예금보호제도가 뱅크런의 완벽한 대비책이 되긴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가 모든 걸 보장하면 은행이 점점 위험한 영업을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뱅크런은 경기가 비이성적으로 과열되었다 침체되거나 자산시장 거품이 심하게 발생한 후 꺼지는 과정에서 흔히 발생한다. 평상시에는 예금자의 예금인출이 안정적 분포를 보이나 경영상태가 악화되면 예금지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고 불안감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은행에 몰려들어 뱅크런이 일어난다. 은행의 지급준비금은 통상 전체 예금의 몇 %밖에 되지 않는다. 대출금을 정해진 기일보다 빨리 회수하는 것도 어렵다. 고객의 예금인출 요구가 쇄도하면 버텨낼 재간이 없다. 뱅크런은 은행의 경영상태가 실제로는 악화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 사이에 헛소문이 퍼져 일어나기도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재 실리콘밸리은행(SVB)은 넘쳐나는 스타트업으로 호사를 누렸으나 대규모 국채 투자 손실로 신뢰를 잃어 뱅크런이 발생했고 결국 파산했다. 트위터가 촉발한 최초의 뱅크런 사태는 SVB에 그치지 않고 미국의 퍼스트리퍼블릭은행, 스위스의 크레디트스위스로 확산되었다. 스위스 2위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가 UBS 은행에 인수된 후 고금리로 세계 금융의 고리에 금이 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작은 농장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주제는 가난한 농부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과 이를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저항과 희망이다. 이를 생각하는데 현재 상황과 오버랩된다. 1930년대 노동계층의 삶을 다룬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분노의 포도’는 오클라호마주 소작농가들이 자신의 토지를 은행에 빼앗기는 억울한 사건을 다뤘다. 저자는 은행의 구조와 생명력을 일찍이 간파한 것 같다.
은행은 다양한 업종을 지원하며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문제가 생기면 국가경제와 국민에게 부담을 주기도 했다. 문득 대공황 시절 파산한 은행을 보며 농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려고 줄을 선 모습을 상상해 본다. 순진한 농민에게 파산할 것 같은 은행 직원이 말한다.
자본과 노동의 선한 연대는 불가능할까? 채권 회수를 위해 생존의 터전마저 서슴없이 강탈하려는 소설 속 은행은 밉지만, 현대경제에서 피 같은 역할을 해서인지 중앙은행이든 국민 세금이든 뒷배가 확실하다. 은행 리스크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현실에서 시스템 위기 방지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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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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