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연에 참석한 정부 요인을 암살하고 권력을 잡은 후 조선을 근대화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이 사건으로 한규직, 조영하, 민태호, 민영식 등 조정 실세들은 목숨을 잃고 민영익은 수차례 칼을 맞고 죽을 뻔 했으나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호러스 앨런의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이 사건은 훗날 조선인들이 단체로 미국 땅을 밟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민치록의 무남독녀로 훗날 명성황후로 추존된 민자영 집안은 아들이 없어 대를 잇기 위해 민승호를 양자를 들이지만 그는 의문의 소포 폭탄으로 명성황후의 친모와 함께 폭사한다. 그러자 다시 대를 잇기 위해 민영익을 민승호의 양자로 들이게 되며 그는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유일한 혈육이 된다. 명성황후는 그를 각별히 아낀 것으로 전해지며 앨런이 그의 생명을 구하면서 고종 부부의 앨런에 대한 신임 또한 두터워지게 된다.
그가 고종의 재가를 얻어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훗날 제중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이곳은 나중에 미국인 L. H. 세버런스의 지원을 받아 이름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꾸며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병원의 하나로 남아 있다.
앨런의 한국과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통과돼 중국인들의 미 입국이 불가능해지자 일본인들의 대량 이주가 시작됐다. 이들이 파업을 일삼으며 백인 농장주의 착취에 조직적인 저항을 벌이자 이에 골치를 앓던 농장주들은 조선 노동자 이민을 추진한다. 당시 대한 제국의 실세이던 민영익과 친분이 두터운 앨런에게 이를 부탁했고 앨런이 민영익과 고종에 요청해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나중에는 수구로 돌았지만 민영익은 1883년 푸트 미국 공사가 조선에 부임한 답례로 보빙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해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국 대륙을 횡단한 후 체스터 아더 대통령과 면담하고 유럽까지 돌아보고 귀국한 인물로 해외 정세에 어느 정도 눈을 뜨고 있었다. 유길준을 첫 유학생으로 보스턴에 보낸 사람도 그다. 민영익과 앨런이 없었더라면 한인들의 미주 이민은 이뤄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조선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들로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언더우드, 메리 스크랜튼도 빼놓을 수 없다. 펜실베니아 출신인 아펜젤러와 런던 출신이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언더우드, 매사추세추 출신인 스크랜튼은 모두 고향은 다르지만 조선에 기독교 복음과 근대 문명의 빛을 전파할 것을 맹세하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같은 날 조선 땅을 밟는다.
아펜젤러 부부는 조선의 정세가 위급하다는 이유로 떠나달라는 미국 대사의 요청에 따라 일단 일본으로 가지만 다시 귀국하며 돌아와서는 배제 학당을 세우고 마가 복음을 번역하며 정동 제일 교회를 세우는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을 남겼다. 정동 교회는 독립 운동의 산실로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도 여기서 치러졌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목포에서 열린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충남 서천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를 당하며 이로 인해 물에 빠진 조선 여학생을 구하려다 순교하고 만다. 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으며 서천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또 조선 최초의 성경 전래지로 그 기념관도 옆에 있다.
그의 딸 앨리스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미국인으로 여겨지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와 교육 활동에 힘썼다. 이화 학당에서 가르치고 이화 여자 전문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으며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 명예 교장으로 일하다 한국에서 숨을 거뒀다.
이화 학당은 메리 스크랜튼이 1886년 명성 황후의 재가를 얻어 세운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스크랜튼은 그 외에도 진명, 숙명, 중앙여학교 설립을 도우며 여성 교육에 진력하다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혔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마가 복음을 함께 번역하고 장로교 정동교회와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 전문학교를 세웠으며 조선인들에게 복음과 함께 독립 사상을 전파해 반일 인사로 찍힌 후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했지만 시신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묻혀 있다. 그의 후손들은 3대에 걸쳐 한국의 교육, 의료, 선교 사업에 힘썼고 4대손인 호러스 언더우드 주니어는 1980년 광주 민주항쟁을 세계에 알린 인물로 유명하다.
미주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의 발전와 민중 교육에 바치고 한인들이 미국에 건너 오는 길까지 열어준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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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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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교사님이 뿌린 씨앗이 자라고 자라 우리 한국인의 눈을 밝혀주었고, 또 이들이 열악한 환경에 있는 나라에서 또 씨앗을 뿌리고... 이민 역사 120주년을 맞이하여 조그마한 땅에 찾아와 복음과 더불어 살길을 우리 한국인들에게 보여준 그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민 위원님,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