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인 이민자 1세인 황보 기 선교사. 1903년 1월 13일 한인 102명을 싣고 하와이에 도착한 겔릭호.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초기 한인 노동자들. 황보 기 선교사의 2~4세대 후손들과 가족. 황보 기 선교사의 후손인 황보 철 고문.
1903년 1월 13일 하와이로 첫 한인 이민이 시작된 이후 올해로 미주 한인 120주년을 맞이한다. 1세기를 훌쩍 넘긴 장구한 세월 동안 언어와 문화적 어려움은 물론 차별과 경제적 고난을 딛고 이민 선조들은 차근차근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어 갔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한인 이민사에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선조들의 피와 땀, 눈물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그중에는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노동자로 일하다 전도사가 돼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선교는 물론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특이한 이력의 한인도 있다. 1905년 하와이에 정착한 초기 한인 이민자 1세대인 황보 기 선교사의 발자취를 통해 한인 이민사의 한 켠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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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농장 처우 개선 요구하다 옥살이도
조선으로 돌아가 교회 개척에 독립운동까지
▷1903년 최초 한인 이민 시작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자는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당시 제물포항)에서 미국 상선 겔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떠난 102명이다. 이들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오하우섬에 도착,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한인 이민의 첫 시작이다. 그 이후 1903년부터 1905년까지 11척의 수송선의 64회 항해를 통해 7,226명이 이주, 사탕수수농장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남자가 6,048명, 부녀자가 637명, 어린아이가 541명이다.
▷사탕수수농장서 고된 이민생활
1881년 7월 7일 경상남도 김해 출신 황보 기는 1903년 9월 도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 농장에서 일했다. 황보 기는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겪으며,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동료들과 작업환경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농장주 체벌 등에 항거하다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돼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때 기독교를 접하고 세례를 받게 된 황보 기는 한인들의 통역을 도우며 그들을 전도했다. 그는 더 나아가 신학 공부를 하고 하와이의 미국인 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7년 만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
1910년 한일합병 직후, 황보 기는 ‘백만인 구령 운동’ 대표로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됐다. 그는 한국을 떠난 지 7년 만에 3년 임기로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탄압과 기독교 박해가 심하던 고국에서 그의 선교 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의 감시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조선의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형제, 자녀들도 탄압과 간섭으로 큰 고난을 겪었다. 끊임없는 일본 경찰의 압수수색으로 성경과 사진, 기록문서들을 모두 몰수당하고, 형제들까지 보국대에 끌려 다니며 징용을 당했다.
임기가 끝날 무렵 부산에 호주 선교사가 들어오고, 호주 선교부가 창설되자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경남지역에서 조선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동래를 시작으로 마산, 진주, 거창, 함양, 합천 선교부를 설치해 많은 교회들을 개척하고 오지의 개척교회를 도왔다. 황보 기 선교사로 인해 ‘예수를 영접한’ 인사는 주기철 목사(마산 출신), 주남선 목사(고려신학교 설립 이사장) 등이 있다. 김익두 목사와는 함양교회에서 같이 사역했다.
그는 이후 지리산 인근에서 과수원과 보육원을 운영하다 1956년 76세에 별세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손들
황보 기 선교사는 조선으로 귀국 후 결혼해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으나, 4남인 황보 성만이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왔다. 장로인 황보 성은 지난해 11월 LA에서 자녀들 중 마지막으로 타계, 직계 2세대의 막이 내렸다. 황보 기의 자손들은 이제 5세대에서 6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황보 기의 조카이자 메릴랜드 엘리콧시티에 거주하고 있는 황보 철 아리랑 USA 공동체 고문은 “한인사회의 세대교체가 가속화되면서 지금이야말로 1세 이민자들의 눈물과 땀으로 이뤄진 한인 이민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할 시점”이라며 “한인 이민사의 소중한 역사적 기억과 자료들이 이민 1세대의 퇴장과 함께 소실되고 있어, 다음 세대들에게 초기 이민자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겨주었으면 한다”며 선조의 삶을 전했다.
▷ “늘 사랑으로 격려해 준 자상한 분”
황보 철 고문은 “큰아버지로 인해 형제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며 “늘 사랑으로 격려해 주신 자상한 분”이라고 회상했다.
황보 고문은 “신사참배와 미국의 파송 선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온 가족이 항상 핍박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내 아버지는 보국대에 끌려다니며 징용 노동을 하다가 만주로 도주, 독립군과 비밀리에 경성을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전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후손 황보 철 고문 이력
황보 기 선교사의 후손인 황보 고문은 미 선교사의 도움으로 1964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미생물학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마친 후 볼티모어의 존스합킨스대 병원에서 임상 미생물학부 부과장으로 방사선 물질을 배합한 세균진단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황보 고문은 큰아버지인 황보 기 선교사의 꿈을 따라 후세 양성에 힘써왔다. 그는 재미한국학교협의회 창립 멤버로 총회장과 이사장, 워싱턴한국학교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벧엘한국학교를 설립했다. 또 한미문화예술협회 이사장, 한미사회봉사센터 이사장, IMF 나라 살리기 모금공연 준비위원 등으로 봉사했다. 1988년 대한민국 국무총리 표창, 1991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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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찬 기자·배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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