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서울 집에는 아침마다 한국일보와 함께 소년한국일보, 일간스포츠 등 3가지 조간신문이 배달됐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선친은 매일 아침 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당시 타블로이드판으로 하루 8면 정도 발행되던 소년한국일보는 당연히 내 차지였다. 나중에 ‘먼 나라 이웃나라’로 유명해진 이원복 교수가 서울대 건축학과에 다니면서 가명으로 연재했던 ‘야망의 그라운드’와 ‘불타는 그라운드’는 초등학생 꼬마의 신문 읽기에 재미를 더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일간스포츠로 신문 읽기가 이어졌다. 한국 최초의 스포츠 신문이었던 일간스포츠는 지금의 프로야구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던 고교야구 소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덕분에 전통의 강호 고교 야구팀 선수들의 신상과 기록을 줄줄이 꿰찰 정도였다. 천재 만화가 고우영이 그린 ‘삼국지’와 ‘수호지’, 대학생 소설가 최인호가 연재한 ‘바보들의 행진’ 같은 청춘 소설은 사춘기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때는 한자 투성이 한국일보를 일일히 옥편을 찾아가며 탐독했다. 당시만해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황석영이 쓴 대하 장편소설 ‘장길산’은 장안의 화제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뼈는 금융인, 몸은 체육인, 피는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은 얼굴”이라고 스스로를 평했던 고 백상 장기영 사주가 불도저같은 리더십으로 필력있는 강골의 기자들을 불러 모아 ‘기자 사관학교’라는 별칭이 한국일보를 따라 다녔다. 지금은 소설가로 명성을 떨치는 김훈을 비롯해 글께나 쓸 줄 아는 기자들이 신문을 제작했고, 사건.사고를 놓치지 않는 독종 사회부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돌이켜 보건데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 언론검열을 피해 기자들이 행간에 숨겨 놓았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신문 읽기의 묘미였다.
대학 시절 청와대 건너편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에 개설된 문화센터가 꽤 인기를 끌었다. 거기서 영어회화 클래스를 열심히 수강했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미국에 와서 구독한 미주 한국일보는 낯선 미국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요즘의 구글 검색엔진과 다름이 없었다.
열독자로 살아가다 90년대 중반 한 한인 신문사에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잡은 첫 풀타임 직장이었다. 선배들로부터 로컬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았다. 대통령을 뽑는 것만큼이나 내가 사는 동네 시의원 선거가 중요하듯, 당시 100만여명이 넘었던 미주 한인들에게 피와 살이 될 내용을 기사화하는 것은 매우 보람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한국어 신문이었지만 기사의 퀄리티가 로컬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기사 만큼은 한국 언론사 기자 수준을 따라 잡으려 단신 하나라도 쓰고 고치고, 고치고 쓰며 심혈을 기울였다. 마감시간에 쫓겨 완성도가 높지 않은 기사를 내보낼 때 아쉬움도 컸다.
한창 중견기자로 활동했던 2000년대만해도 종이신문의 전성기였다. 종합면을 시작으로 경제, 특집, 본국지, 스포츠, 안내광고 섹션 등 하루에 120면이 넘는 신문을 제작했다. 양대 한국어 일간지 사이에 취재경쟁도 치열했다. 밤에도 1~2차례 판갈이를 해가며 경쟁지가 미처 커버하지 못한 기사를 집어 넣었다. 아침 출근 때 경쟁지에 물먹은 기사가 있으면 편집국 분위기는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다.
천직이라 생각했던 언론계를 꽤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몸은 떠나 있어도 신문 구독으로, 스마트폰으로 여러 한인 언론사의 기사들을 꼼꼼히 살피며 열독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2010년대 이후 스마트폰의 보급과 디지털 미디어의 확산은 한국은 물론 미국 언론계의 상황을 크게 변화시켰다. 기자들이 정성들여 취재한 기사는 포털 사이트에 주도권을 내줬고, 아무리 빨리 취재한 기사도 다음날 신문이 나올 때쯤 ‘구문’이 되는 시대가 됐다.
광고의 3분의 2를 독점한 디지털 미디어는 신문과 방송과 같은 전통 매체의 자리를 밀어 내고 있다. 급변하는 언론환경 탓에 같이 일했던 선후배 동료들 상당수가 언론인 생활을 그만뒀다. 독자로서의 삶이 훨씬 길었던 나는 다시 돌아 언론계다. 이번엔 한동안 경쟁지였던 미주 한국일보다. 어느덧 일선 취재현장에서 일하는 최연장자 중 한명이 됐다. 올해부터는 사회부장이라는 중책도 맡았다.
1969년 창간한 미주 한국일보는 올해로 이민 120주년을 맞은 미주 한인사회와 절반 가까운 세월을 동행하며 희노애락을 함께 나눴다. 한국어 신문을 받쳐 주는 양대 축은 독자와 광고주다. 시시각각 변하는 언론환경에선 초심만큼 중요한 건 없을 듯 싶다. 50여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미주 한국일보를 열독해 온 독자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깊이 있는 기사, 신문을 믿고 광고를 싣는 광고주들의 사업이 번창할 수 있도록 소비자들의 흐름을 좇는 트렌드 기사를 발굴하려 한다.
계묘년 새해 미주 한국일보 사회부장의 출사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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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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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달다보면 오타나 뛰어쓰기등 잘못된댓글을 다시한번 돌아가 고칠수있는 program을 다시 설치해놓으면 읽는이도 쓰는이도 좀더 신경을덜쓰며 즐겁게 읽게되리라 생각이되는데 어디한번 어른같은 넓은아량을베풀아 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