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페르세폴리스>였다. 주말 가족여행지로 정한 ‘포트브래그(Fort Bragg)’의 작은 상점가를 지나치던 나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이름이 붙은 ‘서점(The Bookstore)’에는 새빨간 책이 온몸으로 표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란계 프랑스인 작가인 마르잔 사트라피가 쓴 <페르세폴리스>였다. 사트라피는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갔던 자신의 성장기를 유쾌하게 만화로 풀어낸다. 2002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자전적 내용의 이 그래픽소설은 차츰 전세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첫 번째 국외 근무지였던 이란의 현대사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식은 <페르세폴리스>를 읽는 것이다. 나는 2014년 이란 테헤란에서 <페르세폴리스>를 영화화한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8년이 흘러 미국 서부 해안가의 작은 도시 ‘포트브래그’에서 <페르세폴리스>를 다시 마주쳤다. 보채는 아이들과 아내를 얼른 식당에 남겨둔 채 음식이 나오는 동안 잠시 밖으로 나왔다. 나는 ‘서점’에 가야만 했다. 여기는 미국이다. 미국에서 이란을 다룬 책을 전면에 내세우려면 큰 용기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문득 책방 주인의 시각과 심미안이 궁금해졌다. 상인은 상품으로 말한다. 책방의 상품은 책이다. 무슨 책을 팔고 있느냐가 서점의 색깔을 드러낸다.
<페르세폴리스> 밑에는 시리아 소녀 바나 알라베드가 쓴 <세계에게(Dear World)>가 누워있었고 그 밑에는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 전기가 서있었다. 나는 세 권의 책을 확인하고 금세 ‘서점’과 사랑에 빠졌다. 중고책 <페르세폴리스>를 집어들고 9.25달러를 결제했다. 계산대에 붙어있는 ‘서점’의 슬로건은 “책이 인생을 바꾼다(Books change lives)”였다. 적어도 내게는 10달러어치 파워볼 복권을 사는 것보다 10달러짜리 책을 사는 게 인생을 바꿀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 나는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미국에서 보는 영어판 <페르세폴리스>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문을 곱씹어 읽으며 저자 사트라피가 책을 쓴 의도에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었다. 사트라피는 자신의 삶을 담은 이 책을 통해 세계가 이란을 바라보는 방식에 균열을 내려고 했다. 이란에서 5년을 거주한 까닭에 <페르세폴리스>는 내게도 울림이 큰 책이다. 내게 이란은 무엇일까. 나에게 이란은 이란 사람(Iranian people)과 같은 단어다. 여느 한국인과 같이 중동에 대해 무지한 채로 이란 땅을 처음 밟은 이방인에게 사람들은 어딜 가나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오랜 경제제재로 이란은 분명 낙후되었지만 이란 사람들은 손님에 대한 따뜻함과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여행서 론리플래닛도 이란에 가면 ‘사람을 만나라’며 이를 이란식 환대(Iranian hospitality)로 정의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군대를 제대한 지도 만 16년이 되었다. 이중 절반의 세월을 외국에서 보냈다. 제약된 군생활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계기로 작용했다. 제대하고 나서 외국어를 연습해서 점수를 땄고 잉글랜드에서 1년을 수학할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내친 김에 주기적으로 국외근무를 할 수 있는 직업을 모색했다. 회사에 입사해서 처음 발령받은 곳이 이란이다. 이란에서 나는 고산병에 시달리는 산악인 신세였다. 헐떡이면서도 꼭 꼭대기에 오르고 싶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나는 기한을 연장해 5년을 머물렀다. 세상과 떨어진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이번에는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고 싶었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곳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동력을 보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곁눈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2년째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이유다.
나는 외국에 거주하는 일이 하나의 그릇을 빚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게도 세 개의 그릇이 생겼거나 생기고 있는 중일 테다. 학생 시절의 잉글랜드는 내게 간장종지 크기로 남았지만 결혼 초기의 이란은 국을 담는 대접 정도는 된다고 자평한다. 미국 거주는 현재진행형이지만 접시의 형태가 아닐까 짐작한다. 상대적으로 내용물을 담기에 용이했던 이란 생활과 달리 미국 근무에서 깊이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새 12월이다. 2023년을 앞둔 지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깊이가 안 되면 넓이라도 챙겨야겠다. 넓은 접시에 이것저것 담아봐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한다.
요며칠 세계 각국이 축구공 하나를 두고 대결하는 장이 카타르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물론 대한민국을 응원하지만 그만큼 B조의 경기를 유심히 지켜봤다. 나에게 세 개의 그릇으로 존재하는 잉글랜드, 이란, 미국이 같은 조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특히나 미국과 이란, 이란과 미국의 대결은 내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미국의 16강 진출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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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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