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장 하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니, 문구 하나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의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대여섯 글자짜리 표현이었다. 생각날 듯 생각날 듯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나는 이 표현을 2000년대 후반에 처음 접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표현이 시적이거나 철학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 관심있던 작가의 책에서 봤을 가능성이 크다. 2005년에서 2010년 사이로 돌아가 내 기억의 저장고를 뒤지기 시작한다. 수십 분을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내가 찾는 표현이 담긴 책이 무엇인지, 작가가 누구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듯 하다.
당시 나는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인 장영희 선생의 수필을 탐독하고 있었다. 한 일간지의 명수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틈틈이 자신의 글을 묶어서 책으로 펴낸다. 처음 접한 장영희 교수의 책은 <문학의 숲을 거닐다>였다. 영미문학 작품 일부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에피소드를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영문학자로서 심미안을 가지고 인용한 표현이나 문구에 심취했다. 그렇다. 단서를 찾았다. 내가 갈구하는 표현은 장영희 교수의 책에 있을 것이다. 책장을 톺아보며 <문학의 숲을 거닐다>가 어딨는지 살핀다. 샅샅이 뒤졌지만 책이 없다. 아마도 이란과 한국,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책이 사라졌나 보다. 아니면 예스24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헐값을 받고 책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책이 없는 상태에서 다음번 단서를 찾기 위해 헤맨다.
내가 찾는 문구에는 ‘단독자’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리를 이뤄 사는 인간이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단독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게 모두의 숙명이다. 단독자를 떠올리고 나서 무릎을 쳤다. 나머지는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구글로 들어가 ‘단독자’와 ‘장영희’를 친다. 어라, 마땅한 검색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장영희 교수가 인용했을 것으로 내심 기대했던 표현은 ‘신 앞의 단독자’였다. 구글에서 다시 ‘신 앞의 단독자’를 친다. ‘신 앞의 단독자’, 보다 정확히 말해 ‘신 앞에 선 단독자’는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한 유명한 말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훌륭한 문구지만 내가 찾던 표현이 아니다. 영문학자인 장영희 교수가 철학자의 표현을 인용해서 이야기를 전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독자’에 대한 내 집착을 버려야 할 시점이다.
다행히 내게는 빨간색 다이어리가 있다. 대학생 시절, 아르헨티나 혁명가의 일생을 다룬 <체 게바라 평전>이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이 성공을 거두자 체 게바라를 다룬 비슷한 부류의 책들이 하나둘 나왔다. 나는 체 게바라의 일대기보다는 사은품인 빨간색 양장본 다이어리가 탐나서 <체의 마지막 일기>를 샀다. 체 게바라의 일기는 열심히 읽지 않았지만 빨간색 다이어리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의식적으로 수집했다. 첫 페이지에는 아일랜드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문장을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해 붙여놓았다. “다가오라 삶이여! 나는 체험의 현실을 몇 백만번이고 부닥쳐 보기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의 대장간 속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벼리어내기 떠난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다이어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다. 장영희 교수의 책에 나온 표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찾지 못했다. 벌써 자정이 가깝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잠들어야 할 시간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냉장고에서 기네스를 하나 꺼냈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스타우트 맥주를 목에 털어넣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기운을 받아 꿈에서라도 문장이 떠오르기를 바라는 얕은 심산이었다.
알람시계를 설정해 놓지도 않았지만 오전 5시가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내가 처음 떠올린 단어는 ‘해석자’였다. 잠자는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표현을 생각하려고 애썼나 보다. ‘해석자, 해석자, 지구의 해석자...’ 맞다, 지구의 해석자! 내가 찾아헤맨 표현은 ‘지구의 해석자’였다. 장영희 교수의 책에서 처음 접한 이 표현은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사랑은>에 나오는 문구다. 원문은 “지구의 주창자(The exponent of Earth)”지만 장영희 교수는 이를 ‘지구의 해석자’로 번역했다. 지구의 해석자가 꼭 사랑에만 해당되는 표현은 아닐 테다. 나는 인간의 삶은 결국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 자신의 해석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수단이 다를 뿐 인간은 누구나 지구의 해석자인 셈이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는 기술(technology)로 지구를 해석한다. 그렇다면 나는 기술(description)로 지구를 해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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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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