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왔나? 어디 있지?
업스테이트 뉴욕에 올라가서 치른 딸아이의 혼사. 정신 없이 신부 아버지 인사를 마치고 식사에 들어가기 전 아내와 함께 하객들 가운데 K를 찾았다. K와 아이는 버지니아 애쉬번에서 다닌 고교 시절의 단짝 친구 사이다. 공부 좀 한다는 대여섯이 어울려 주니어 프롬, 프롬, 졸업식 후 여름 바닷가 여행까지 빛나는 십대를 함께 했다.
아이는 K의 집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딸 셋의 장녀로 K가 집에서 발언권을 행사도 했겠지만 그 부모 또한 우리 애를 딸 하나 더 둔 듯이 살갑게 대했다. 아이리쉬들이 유독 정이 많다고 그러더니 가족의 끈끈함이 남달랐다.
우리야 외롭게 커 온 외동이라 그저 고맙기만 했다. 우리의 좁은 타운하우스 보다 넓은 단독주택인 K의 집이 편하기도 했고, 우리 애가 변죽이 좋은 편이기도 했다. 한번은 두 시간 거리의 애나폴리스에 정박한 요트에서 하루 자고 오는 K네의 가족행사에 묻어서 놀고 오기도 했다.
K의 아버지는 동네 자원봉사클럽의 회장을 맡을 정도로 밝고 외향적이었다. 그러니 우리 애와도 부녀처럼 할 말 못할 말없이 친했나 보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클럽에서 한 명 주는 장학금에 우리 애를 추천했다.
딸친구까지 챙기며 딸한테 멋진 아빠. 아버지라면 의당 그래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이들 학교 행사에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영어로 주고받는 분위기가 너무 불편하고 두려워서다.
엄마만 보이니 학교에서 애들 사이에 미스터리로 불렸다. 미스터 정인데. 졸업식 직전에 따로 하는 상장 수여식에서 카운슬러가 ‘드디어’ 진이 아빠를 봤다고 했을 정도다. 프롬에 앞서 한 집에 모인 부모들 단체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어느 놈이 내 얼굴에 ‘마오쩌뚱’이라고 태그를 건 것도 내가 태평양만큼 멀게 느껴져서 였을 것이다.
나라고 애 친구들과 말 섞고 장난 걸고 싶지 않았겠냐만 어쩌다 모임에 가면 누가 말이라도 걸까봐 뒤로 물러나 벽에 붙어서 가끔 고개 끄덕거려 아는 척 하는 게 고작이었다.
졸업반이 되어 차가 생긴 K는 우리 대신 아이의 라이드를 주기도 했다. 보험료, 기름값을 벌어야 해서 골프장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자기 차를 모는 뿌듯함은 그런 걸로 배가 되는 법이니까 신이 나서 찾아오고는 했다.
하루는 애랑 나랑 둘이 있는데 벨이 울려 문을 열어보니 K였다. 애는 준비가 덜 끝나 윗층 방에 있어 K와 나는 얼굴을 마주하고 벌쭘하니 문간에서 기다려야 했다. 먼저 말을 걸어온 건 K였다. 자기 딴에는 꽤나 애를 썼을 터이다. 미스터 정도 우리 아빠처럼 컨트리 좋아하세요? 공통의 화제를 찾기 위한 노력. 우리 아빠는 닐 다이어먼드의 ‘스위트 캐롤라인’을 좋아하는데… 나도 그 노래 아는데…
그때 애가 내려와 우리의 대화는 마무리됐다. 그게 내가 K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딸애의 절친과 고작 두어 마디 나누는 것도 그렇게 어색하고 힘들었던 아시안 아빠. 그게 나였다.
그러고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우리 자리에서 멀리 반대편에 있는 K를 아내가 먼저 알아보았다. 다가가니 반가워하며 일어나는 K.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하이 K, 말을 걸었다. 같이 온 피앙세를 소개 받아 악수도 나누고.
부모님 안부부터 물었다. 요트를 좋아하더니 결국은 애나폴리스에 가서 산다고 한다. 진이 데리고 거기서 슬립오버 했었지? K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부즈 알렌 다닌다고 하던데? 더 밝아진 얼굴로 K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살짝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스피치 좋았다고 덧붙인 K가 눈시울 붉히며 물어왔다. 내가 허그 해도 돼요? K를 안으며 딸의 팔을 잡고 행진할 때처럼 또 울컥했다.
이민 와서 한국분들 가운데 살다보니 포기하다시피 했던 영어 공부. 뒤늦게나마 다시 시작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사람들 모이면 앞에 나서지 않는다. 아내를 앞세운다. 이번 결혼식에서도 사돈네며 애 친구, 사위 친구들 상대해서 분위기 살리려고 애쓴 건 아내다. 평소 그렇게 어색한 아빠를 너무도 잘 아는 아이는 신부 아버지 인사말 순서를 앞두고 얼마나 초조하고 조마조마 했을까.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달달 외운 덕에 스피치는 실수 없이 마쳤는데 아쉽게 동영상은 없다. 그래도 괜찮다. 애한테 큰 선물을 해준 기분이다. 남들 아빠처럼.
정재욱 <전 언론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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