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가지는 상상의 힘보다 더 강력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소설이 지닌 공감의 힘을 느끼고 싶게 하는 영화가 있다. 2022 베니스 영화제에서 만난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와 쿠보타 마사타카, 그리고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영화 ‘한 남자’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단정한 필체 그대로 시각화되었다. 원작의 탄탄함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마지막 장면에서 원작자 히라노 게이치로의 짧은 등장이 여운으로 남았다.
‘사랑했던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라는 한 줄 카피로 설명하기는 턱없이 부족해 ‘신분 세탁’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인간의 존재에 천착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한 남자’의 화자인 기도 아키라가 재일 3세 한국인(자이니치)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침잠의 시간을 갖게 했다.
‘한 남자’ 속 일본은 여전히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이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는 “재일 3세 한국인이라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온 저와 한국 독자들의 교류 덕분”이라며 “대립을 부추기는 사람은 ‘저 사람은 한국인이다’라고 범주화한다. 하지만, 지금 세대에서는 복잡함을 서로 인정하고, 어딘가의 접점에서부터 관계를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1999년 2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일본 현대문학의 기수가 그이다. 그런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소설 속 자이니치는 식민지 시대의 선조만큼 처절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차별과 멸시를 당한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옛 의뢰인으로부터 죽은 남편의 ‘정체’를 조사해달라는 상담을 받은 기도 아키라 변호사는 재일 한국인 3세이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후에야 그의 이름, 그의 과거, 그의 모든 것이 완전히 낯선 이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의뢰에 수수께기의 남자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매우 깊이 사색하게 된다. ‘한 남자’의 존재를 알아갈수록 오히려 본인을 알아가게 되는 것. ‘한 남자’가 거울이 되어 그가 드러나는 만큼 그 역시 거기에 비치게 된다는 구조인 셈이다. 히라노 작가는 이와 같이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고, 비로소 한 사람의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한 남자’를 통해 알려준다.
동일본 대지진 후 40대를 맞으면서 히라노 작가는 ‘단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렸다고 했다. 이만하면 괜찮은가, 자신은 제대로 살고 있는가를 자문하다 보니 환경의 불리함 탓에 그런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사람에 생각이 가닿았고 거기서 타인을 살아가는 인물을 상상해냈다고 했다. 히라노 작가는 “인생은 출발 시점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내가 만약 ‘이런 부모에게서는 절대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라고 할 만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완전히 다른 인물로 살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러한 지점에서 이야기가 커져갔다”고 했다.
부부의 사랑이 그토록 절실했음에도 왜 남편이 진짜 이름을 버린 채 가짜 이름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과거가 비밀에 싸인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던 ‘한 남자’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제2, 제3의 신분을 바꾼 남자들이 나타나고, 단서를 흘리는 사기꾼 재소자의 존재가 미스테리 색채를 드리웠지만, ‘한 남자’의 정체를 파헤치면서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되는 주인공으로 인해 ‘한 남자’를 뒤쫓는 걸음걸음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절망의 심연에서 ‘단 한 번 사는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이란 한 줄기 희망에 매달려 악의 열매를 따먹어버린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2020년 소설 ‘한 남자’를 발표할 당시 작가는 1993년과 비교해 70% 정도로 규모가 줄어든 일본 순문학 시장에서 ‘소설의 힘’을 믿고 소설을 통해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며, ‘공감’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자 한다고 밝혔다. 소설이나 영화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공감하는 일이 있는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서 감동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거다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의 열 네번째 소설 ‘한 남자’가 바로 지금의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히라노 작가는 기도라는 주인공을 통해 아름다움보다는 인간적인 ‘선함’의 이상적인 모습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재일 한국인 역을 맡은 츠마부키 사토시(42)는 “많은 자이니치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을 자이니치라고 구분짓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은 여전히 섬나라인 것 같다. 일본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인데 역사상 쇄국정책을 취하기도 했고 순수 일본인, 단일민족과 단일문화를 내세우고 싶어했다. 이런 경향이 일본인들의 시야를 점점 편협하게 만든다. 기도 아키라를 통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했다.
‘한 남자’라는 소설과 영화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40대 일본인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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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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