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일주일마다 반복한다. 토요일 새벽만 되면 한 주간 숨겨둔 또 다른 자아를 나지막이 불러낸다. 343개의 호(號)에 평생 급변하는 자기정체성을 담았다는 추사 김정희를 흉내내 나도 48시간 동안 사용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대학에 들어가 지식 대신 맥주를 들이킨 결과 배움은 내게 한(恨)으로 남았다. 어찌어찌 졸업장을 땄지만 학교에서 뭘 배웠냐는 질문을 받으면 매번 가슴이 찔린다. 그렇다. 내게는 사회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채 사회학과를 나왔다는 부채의식이 있다. 나는 일생동안 이 빚을 갚기 위해 틈나는 대로 큰배움터를 순례하는 중이다. 다행히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상의 진전을 이끈 대학이 우뚝 서있다. 앎을 추구하는 이로서 ‘학도(學徒)’라는 별칭을 붙인 나는 880번 도로를 따라 UC버클리 앞 커피숍으로 몸과 마음을 옮긴다.
시공간을 초월해 내가 가장 희구하는 버클리의 커피숍은 ‘에스프레소 익스피리언스(Espresso Experience)’다. 지금은 문을 닫은 이 카페를 상상하며 나는 가상의 나를 창조해 과거의 어느 순간, 어느 지점으로 보낸다. 실재(實在)의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0년 10월, 가상의 나는 밴크로프트(Bancroft) 거리 2440번지에 서있다. 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선 나는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는 민머리의 안경낀 사내를 마주한다. UC버클리에 방문교수로 온 프랑스의 스타 철학자를 나는 단박에 알아본다. 그의 이름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다.
대학 시절,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을 읽어야 했던 나는 온힘을 다해 미셸 푸코에게 반가움을 표현한다.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앗, 이곳은 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세계다. 1980년 10월, ‘에스프레소 익스피리언스’에 미셸 푸코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나는 상상의 시공간에서 그를 만난다. 이런 상황을 누군가는 초월우주라 표현할 것이다. 영어로 하면 ‘메타버스(Metaverse)’ 정도가 될까?
지난달 말 산호세 시내 맥에너리(McEnery) 컨벤션 센터에서는 메타버스 콘퍼런스가 열렸다. 미국 전역, 아니 세계 각지에서 온 연사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미래상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메타버스를 이야기하는 시대지만 누구도 명쾌하게 메타버스를 정의하지 못한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밥값을 하고 싶었던 나는 억지로라도 발표가 끝날 때마다 연신 질문을 던졌다.
“메타버스와 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MMO) 커뮤니티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MMO 커뮤니티를 이미 구축하고 있다. 메타버스는 이를 뛰어넘는 크고 분명한 진화(evolution)로 볼 수 있나?”
“기업들은 단일화된 메타버스(The Metaverse) 이상향을 제시하다가 최근 일종의 메타버스(a metaverse)로 마케팅 방향을 선회했다. 하나로 통합된 메타버스 세상을 구축하는 일이 어렵다고 봐야하지 않나?”
“당신은 메타버스의 구성요소를 사람(people), 사물(objects), 공간(spaces), 장소(places)로 제시했다. 한국에서는 콘텐츠(contents), 플랫폼(platform), 네트워크(network), 디바이스(device)로 구분하는 게 일반적이다. 사람이 빠져있다. 메타버스 세계에서 사람은 사용자에 불과한가? 아니면 주체성을 가진 인간인가?”
거대한 질문을 던진 탓인지 속시원한 답변을 한 차례도 듣지 못했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타버스 콘퍼런스의 연사들은 한결같이 ‘탈중앙화(decentralization)’를 이야기했다. 중앙화가 어느 한 주체가 통제하고 지시하고 결정하는 구조라면 탈중앙화는 특정 주체의 통제, 지시, 결정을 벗어난 체계를 뜻한다. 발표자들은 ‘메타버스의 첫 번째 전제는 시공간의 탈중앙화다’고 입을 모아 강조했다. 메타버스를 산업과 기술로만 접근했던 나는 탈중앙화 개념을 접하고 무엇보다 반가웠다. 동시에 그동안 부박했던 나의 인식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의식적으로 미셸 푸코를 떠올렸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Panopticon)’을 고찰한다. 파놉티콘은 소수의 감시자가 한가운데서 모든 수용자를 통제할 수 있는 원형 감옥으로 중앙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미셸 푸코는 파놉티콘의 개념을 근대사회 전반으로 확장해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이는 소수의 테크기업에 정보와 권한을 위탁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 생활방식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가 살아있다면 현대사회를 어떻게 바라볼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가상의 ‘에스프레소 익스피리언스’에서 푸코에게 연신 질문을 던졌지만 메타버스 세계에서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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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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