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상적으로 스티브 잡스에 끌리지만 현상적으로 빌 게이츠의 제품을 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가치를 누구보다 이해한다고 자부하지만 아이폰이나 맥북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술은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젠체하며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니다.
일평생 마이크로소프트 윈도(Windows)만 쓰면서 살아온 나는 다른 소프트웨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주로 글을 쓰거나 문서작업을 하는 내게는 운영체제(OS)보다 키보드의 타건감이 훨씬 중요하다. 애플의 지향점을 파고들게 된 동기는 잡스의 죽음이었다. 사후 발간된 그의 공식전기를 읽으며 잡스가 한결같이 추구한 기업가정신에 깊이 공감했다. 역설적으로 잡스는 죽음을 통해 내게 살아있는 존재로 남았다.
빌 게이츠는 어떨까? 그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자선재단을 만들어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빌 게이츠의 철학을 접할 계기는 좀처럼 없었다. 툭하면 뉴욕타임스의 주말 북섹션을 장식하는 엄청난 독서가라는 사실 말고는 특별히 매력을 느낄 만한 부분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짧았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1년 4개월, 나는 마침내 빌 게이츠가 추구하는 바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지난 6월 14일, UC버클리에서 열린 테크크런치 행사의 연사로 초청된 빌 게이츠는 기후위기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빌 게이츠는 2015년 지구가 마주한 에너지 난관을 뚫고나가기 위해 직접 ‘돌파구(Breakthrough)’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한다. ‘브레이크스루 에너지’의 창업자로서 그는 2050년까지 탄소제로를 실현하기 위한 자신의 계획과 우리 모두의 동참을 촉구했다. 예순여섯의 나이가 무색하게 1세대 창업가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기술로 세상을 뒤흔든 빌 게이츠지만 그는 더이상 기술결정론자가 아니다. 빌 게이츠는 “청정기술 분야에서 어떤 식으로 자본을 배치할 것인가(How to deploy billions in clean tech)”라는 주제를 두고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축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25%의 잘사는 나라(rich countries)에 탄소제로 기술을 판매하고 정책 도입을 장려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관건은 75%에 달하는 중·저소득 국가(middle-income countries)를 상대로 ‘기술을 어떻게 전파하고 정책 도입을 얼마나 유도하는가’다. 빌 게이츠는 브레이크스루 에너지를 통해 기술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75%의 세계가 탄소제로를 실현할 수 있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의 대담을 들으며 나는 줄곧 ‘개발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동시에 나의 표현인지 감수성을 성찰했다. 그는 강연에서 개발된 나라(developed country)와 개발 중인 나라(developing country)를 대항하는 개념으로 계속 활용했다. 우리말로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많은 이가 선진국(先進國)이라는 단어를 쓰는 데는 큰 거리낌이 없지만 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후진국(後進國)이라는 표현을 더이상 대놓고 쓰지 않는다. 세계를 앞선 국가와 뒤떨어진 나라로 양분하는 것은 섬세하지 못한 접근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선진국에 대립되는 용어로 개발도상국을 사용한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이 동태적 관점에서 ‘개발 중(developing)’을 강조하는 낱말이라면 선진국은 이와 대응하는 적절한 어휘가 아니다. ‘개발된(developed)’은 일련의 움직임을 끝내고 어느 지점에 도달한 정태적 개념이다. 우리가 개발 중인 나라를 ‘개발도상국’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면 여기에 상응하는 세밀한 표현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경제개발을 마친 국가를 선진국으로 뭉뚱그려 이상화하기보다는 ‘개발도달국’으로 적확히 지칭해야 온당할 것이다.
빌 게이츠는 “영향력이 큰 분야에서 아이디어를 추구하라(Pursue the ideas in high impact areas)”며 대담을 마무리했다. 2050년까지 탄소제로를 실현하려는 야심가의 마지막 발언에는 보다 많은 창업가들이 기후위기 해결사업에 뛰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나도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개인적 실천을 다하고 있지만 빌 게이츠의 조언을 따라 기업까지 만들 용기는 없다. 대신 나는 내 분야의 영향력을 키울 계획이다. 얼마 전 읽은 책 <어른의 어휘력>에서 힌트를 주는 문장을 발견했다. 내 마음을 송곳같이 대변하기에 소개하며 마친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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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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