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미국에서 살 때의 일이다. 영화관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고 있었다. 영화는 2시간 38분 내내 음산하고 불길해서 사람을 바짝 긴장시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촉각을 곤두세우며 보고 있는데 팝콘 씹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와작와작. 심기가 불편해져 돌아보니 양 옆에 앉은 두 사람 모두 팝콘을 동시다발적으로 씹고 있었다. 와작와작, 와작와작와작. 아, 이런 영화를 보면서도 굳이 팝콘을 먹어야 한다니. 좌절스러웠지만 그들의 권리이므로 존중 받아야 마땅했다. 결국 내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빈자리로 옮겨 영화를 마저 보았다.
영화관에서 팝콘을 꼭 먹어야 하는 걸까? 먹는 게 일인 음식평론가이지만 영화관에서는 먹지 않는다. 아무래도 씹을 때 와작와작 나는 소리가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영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소리로는 일어날 수 있는 예술 매체가 영화인데, 팝콘을 씹다 보면 아무래도 미묘한 전개를 놓치기가 쉽다.
그렇지만 팝콘을 단순히 음식으로만 여기면 놓치는 게 있다. 영화관의 수익원으로서 팝콘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굳이 팝콘일까? 다른 음식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영화관이라면 팝콘을 바로 떠올릴 정도로 둘 사이의 관계가 각인된 것만은 사실이다. 대체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조건반사적으로 장소와 음식을 짝짓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자.
■ 팝콘에 최적화된 옥수수는 따로 있다
일단 팝콘이라는 음식 자체부터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여름에 즐겨 먹는 초당이니 찰옥수수 같은 품종은 아무리 잘 말린다고 하더라도 푹신하고도 바삭하게 부풀어 오른 팝콘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든 옥수수가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지 않고, 특히 찌거나 삶아서 맛있는 품종이라면 팝콘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문자 그대로 ‘씨가 다른’ 팝콘용 품종은 따로 있다. 옥수수를 전부 여섯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데(그냥 먹는 옥수수는 ‘스위트콘’에 속한다), 팝콘 또한 하나의 유형을 꿰찰 정도로 중요하다. 알갱이가 납작한 정육면체에 가깝게 생겨 흔히 옥수수를 치아에 비교하는데, 팝콘은 대체로 알갱이가 작고 모양도 물방울처럼 동그랗다.
팝콘 품종은 어떻게 뻥튀기에 최적화되는 걸까? 유난히 더 질기고 밀도도 높은 셀룰로스 섬유질의 껍질 덕분이다. 열을 잘 흡수해 뻥 터지는 부분인 배젖에 잘 전달할뿐더러, 배젖 내부의 수분이 수증기로 바뀌며 내부의 압력이 올라가도 다른 품종보다 더 잘 버틴다.
이처럼 껍질이 밀도도 높고 단단한 덕분에 팝콘 옥수수는 135프사이(psi), 180도까지 버티다가 뻥! 터져 몸집을 몇 배로 불린다.
옥수수는 약 1만 년 전 현재의 멕시코에서 처음 경작되었는데, 팝콘을 튀겨 먹었다는 정황은 페루에서 발견된 화석에 의해 기원전 4,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팝콘을 위한 품종은 남북 아메리카로 퍼져 나갔으나 대체로 남쪽에서만 살아남았다. 근현대에 이르러 팝콘이 오늘날과 같은 영화관 음식으로 자리 잡을 기회를 잡은 건 19세기 초이다. 고래를 잡으려고 칠레까지 내려온 미국인들이 작고 귀엽다는 이유로 팝콘 옥수수를 챙겨 본국으로 돌아간 덕분이었다. 이후 뉴잉글랜드 지방을 필두로 팝콘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미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해 서커스나 박람회 등 당시 미국인들의 여가를 책임졌던 장소 곳곳을 파고들었다. ‘미국 백과 사전’에 ‘팝콘’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재된 것도 바로 이때이다.
■ ‘팝콘=영화관’ 공식은 유성영화 등장 이후
팝콘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국민 간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이동식 팝콘 튀김기의 등장 덕분이었다. 원래 팝콘은 냄비에 담아 불에 올려 손으로 직접 튀겨 팔았는데 1885년, 발명가 찰스 크레이터가 증기를 쓰는 이동식 팝콘 튀김기를 출시했다. 오늘날에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푸드카트를 닮은 튀김기는 이동이 편해 팝콘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감자칩 같은 음식처럼 많은 양의 기름이나 식기가 필요하지 않고 조리 시간마저 짧은 장점 말이다. 팝콘이 대세로 자리 잡는 건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다.
이처럼 팝콘이 본격적인 여흥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단 한 군데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영화관이었다. 그렇다, 이제는 ‘영화관=팝콘’이라는 등식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를 만큼 둘의 관계가 떼려야 뗄 수 없지만, 처음부터 만남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영화관은 팝콘을 최대한 멀리하려 애를 썼다. 왜 그랬을까?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관은 소위 상류계층의 여가 수단이었다. 대사가 간간이 등장하는 자막으로만 제공되었으므로 식자층만이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이에 발맞춰 영화관은 연극이나 오페라 같은 실연 무대를 위한 극장을 그대로 옮겨 구축하고 꾸민 공간이었다. 붉은 카펫과 금박 장식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냄새를 풍기는 팝콘이 낄 자리는 없었다.
그랬던 현실이 1927년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이제 대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식자층이 아니더라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영화가 오늘날처럼 좀 더 대중스러운 여가 수단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되자 이미 국민 간식이었던 팝콘을 파는 장사꾼들이 영화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앞에서 소개한 이동식 튀김기를 끌고 영화관 앞에서 팝콘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기어이 영화관에 진출한 팝콘의 입지는 두 역사적 대사건을 계기로 대폭 넓어진다. 첫 번째는 대공황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대공황으로 인해 일자리가 없어지는 등 힘든 나날이 이어지자 사람들이 당시로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극장으로 몰려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팝콘도 원래 싼 가격으로 열심히 장단을 맞췄다. 5, 10센트면 한 봉지를 살 수 있었으니 먹는 이도 부담이 없었지만, 옥수수 10달러어치를 몇 년 두고 쓸 수 있을 만큼 파는 이에게도 부담이 없었다. 팝콘이 영화관의 간식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아 버리자, 극장에서는 드디어 현실을 파악하고 팝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일단 로비를 개방하고 팝콘 장수를 들여 수익을 나누다가, 곧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아예 직접 판매를 시작한다.
그리고 약 15년 뒤, 제2차 세계대전에 팝콘은 다시 한번 세를 확실하게 불린다. 전쟁으로 인해 설탕 같은 물자가 징발 및 배급돼 사탕이나 청량음료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팝콘은 원래 싼 옥수수에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식용유와 소금만으로 만드는 음식이라, 입지를 전혀 위협받지 않고 자기 자리를 꿋꿋이 지킬 수 있었다.
■ TV도 막지 못한 팝콘의 인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던 팝콘의 기세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위기를 맞이한다. 텔레비전의 등장 탓이다. 집에 앉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여흥 수단이 등장하자 많은 이들이 극장으로 향했던 발걸음을 줄이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팝콘 또한 덜 먹게 되었다. 집에서도 팝콘을 튀길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절차가 번거롭기에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팝콘은 오래 좌절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즉석 팝콘 ‘지피 팝(Jiffy pop)’이 등장한 덕분이다. 인디애나주 라포르테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프레데릭 C. 메넨이 1958년 발명한 지피 팝은 은박지 팬에 담겨 있어 그대로 불에 올려 가열하면 포장이 부풀어 오르며 팝콘이 튀겨지는 제품이었다.
한편 오늘날 즉석 팝콘으로 대세인 전자레인지 팝콘은 사실 전자레인지 자체와 함께 등장했다. 전자레인지 발명에 팝콘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말이다. 1945년 10월 8일, 레이다 제작 업체 레이시온사의 직원인 퍼시 스펜서가 레이다 장비에 쓰일 마그네트론 옆에 서 있었다. 그러자 주머니에 간식으로 먹으려고 넣어 두었던 초콜릿 바가 녹아 내렸다. 장비의 영향이라고 생각한 그가 팝콘용 옥수수를 가져와 실험해보자 튀겨져 팝콘이 되었다.
이 실험을 바탕으로 결국 세계 최초의 전자레인지인 레이다레인지가 등장했고, 스펜서는 1949년 극초단파로 팝콘 튀기는 법의 특허를 출원한다. 그의 특허는 옥수수가 통째로 담긴 포장에 극초단파를 가해 튀기는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오늘날 두루 먹는, 종이 봉지에 알맹이가 담긴 전자레인지 즉석 팝콘의 특허는 1981년, 식품 기업 제네럴 밀스가 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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