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분이 계신다. 미국에 처음 도착하고 첫째 딸의 바이올린 선생님으로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분의 남편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 남편분으로 말할 거 같으면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시고 같은 학교 교수님으로 재직하고 계시던 중 너무도 이쁘고 멋진 KBS 공영방송 아나운서를 만나셨단다. 바로 그분이 안용구 선생님이시고 그 아나운서가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분이시다. 바이올리스트와 아나운서의 운명적인 삶이 미국에서 펼쳐졌다.
몇 년 전 돌연 2층으로 향한 계단에서 뒤로 넘어지는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남편에게 하신 말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한 번에 가셨잖아. 누구는 평생 아픈 남편 뒤치닥거리로 징글징글하게 아내를 부려만 먹다가 가는 사람도 많은데 그래도 안 선생님은 그동안 내가 하도 고생한 걸 알고 그냥 하루아침에 가버리신 거야. 그래서 난 괜찮아.” 하시며 누가 먼저 위로의 인사라도 전할세라 선수 치시며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에서 오래 함께한 진한 부부의 사랑을 느꼈다. 그렇게 홀연히 아무것도 정리 안하시고 가셨다고 속상해하실 만도 한데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을 이렇게 위로하시며 남편을 우대하는 모습이 진정한 사랑이라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그 뒤로도 몇 년이 지난 이번 해에도 남편을 기리는 추모 콘서트를 여셨다. 매해 그러하듯 유명한 필라델피아 단원인 선생님의 딸이 비올라로 구슬프고 멋진 음악을 연주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기리는 축사를 하고 손주들은 케이크를 자르며 콘서트는 마무리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변화되는 모습 중의 하나가 집안에 사람을 불러들이는 어려운 일이고 더구나 호스트의 호탕함이 있어야 분위기가 밝아지고 손이 넉넉해야 풍족한 파티가 되는데 이런 파티의 호스트를 자청하시는 엄마의 체력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엄마와 같이 다니시는 분들의 모습도 다양하신데 그중에 한 분이 어느 날 아주 쑥스러워하시며 말씀하신다. “요즘 살이 쪄서 큰일이야. 할범이 가시고 한달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배가 나오고 있으니 남들 보기에 민망해 죽겠어.” 남편이 돌아가신 것도 몰랐던 터라 그분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살이 자꾸 쪄서 민망하시다는 말에는 웃음이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부부로 살았던 삶이 50년 이상이고 그중에 7여년을 누워만 계신 분을 요양원도 아닌 집에서 병수발을 하시며 고생하셨는데 가신 건 안타깝지만 그래도 몸이 편하니 살이 찌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를 넘어 힘들었던 육신의 편안함은 민망함을 넘어서는구나 싶고, 오랫동안 부부의 삶으로 살다가 혼자 살아야만 하는 홀로서기가 병시중보다는 수월하다 싶으니 인간의 간사함이 아닌 솔직한 인간애가 느껴져 그분의 미소가 슬프지만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또 한마디 하신다. 딱하나 아쉬움이 남는 일이 바로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보면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일인데 그게 그리 한스러우시다며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매일 아침 남편의 사진을 보며, “여보 미안해,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신다. 직접 전하지 못한 말씀을 남편이 가시고 허공에 대고 하시는 말이 얼마나 안타깝나 싶지만 그렇게라도 그분에게 전달된다면 좋겠다 싶었다.
또 한 분은 진짜 내 엄마와 닮으신 분이 다. 나이도 비슷하게 80대이신데 나도 귀찮아서 하고 싶지 않은 멋에 대한 부지런함이 남다르신 분이다. 단 한 번도 아무렇게나 입고 나오시는 법이 없고 항상 우아하게 차려입으시고 단아하게 화장을 하시고 머리를 정갈하고 멋지게 손질하시고 액세서리도 요란하진 않지만 오래전에 구입하셨다고 하시면서 귀중하게 착용하신다. 내 엄마의 매니큐어 바르지 않은 맨손을 본 적이 없어 그런 모습을 사치로만 여겼던 나의 어리석음을 이 분을 통해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두 분 중 한 분은 키가 크시고 한 분은 키가 조금 작으시고 머리 스타일도 다르고 성격 또한 달라 누가 봐도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두 분이 계신다. 한국에서 그 시절 내노라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후배로 만나 서로 결혼을 한 후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오시고 지금까지 때론 언니 동생으로, 때론 절친으로 멋진 만남을 이어가신다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고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기적인 만남이 정신적인 건강에 아주 좋다는 말을 들었다.
매력적인 여자의 모습은 20대 청춘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60이 되고 70이 되고, 그리고 80이 되면 아무것도 없을 거 같지만 실제로는 활기차게 인생을 설계하며 젊은이들 못지않게 인생을 즐기고 계시는 분들이 주위에는 많다. 한 번뿐인 자기의 삶을 멋지게 펼치고 있는 분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오늘을 살고 계신다. 80세가 매력적인 이유가 너무도 많아진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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