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언어가 가능한 윤삼실 (사진) 원장이 부임한 1998년 이후부터 한인양로원은 하와이 한인사회 중심에 자리하며 1세들의 노후대책 마련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김맹조 홈장과 노인들 (1956)
8월 17일은 한인기독교회 (“릴리하”교회) 소속 한인양로원 (Korean Care Home) 이 지금 장소에 새 집을 짓고 들어간지 65년이 되는 날이다.
한인양로원은 하와이주법에 따라 제2종 성인양호원 (Adult Residential Care Home, 약자로 ARCH) 이다. 제1종은 5명 이하의 노인을 양호하는 집이고, 제2종은 6명 이상을 양호하는 곳이다.
이 성인양호원은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 노인 아파트와는 달리 연로하신 분들이 독자적으로 보행, 목욕, 화장실 사용, 옷갈아 입기 또는 침대에 오르내르기 등을 할 수 없을 때 숙식하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이 분들이 의사나 간호원의 도움이 계속 필요하게 되면, 이곳에 더 머무를수 없고 간병원 (Nursing Home)으로 옮겨가야 한다.
한인양로원은 1924년에 전경준이 한인상조회로 시작하였다.
한인상조회는 한인들의 장례를 위하여 회원들이 매달 25센트씩 내고, 회원이 죽으면 장례를 치러주는 조직체였다.
한인상조회가 조직되자 교민단 (구 국민회) 회원 다수가 입회하였고, 교민단 총단장 김영기는 국민보를 통하여 상조회무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경준은 1912년에 조직된 한인 구세군영에서 사역하였었는데, 1928년에는 한인기독교회의 재무로 수고하였다.
전경준이 상조회를 위해 보수 없이 매일 몇 마일씩 걸어 다니며 회비를 걷은 결괴로 상조회는 매년 몇백 달러를 저축할 수 있었다.
1929년에 270 노스 스쿨 스트리트 뒷편에 집 한채와 레아이 지역의 마키니 스트리트에 집 두 채를 1만 8천 달러로 매입하였다.
7,000달러를 선불하고 나머지는 은행에서 주택담보를 받았다.
노스 스트리트집을 Korean Old Men’s Home이라 불렀고, 이 집에 남성 노인들이 자취하면서 월세를 냈다.
그러나 곧 경제공황이 일어나 상조회는 은행 빚을 갚으면서 노인들을 돕느라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더구나 상조회의 주요 업무가 양로원 운영으로 바뀌게 되면서, 국민회는 노령화되는 회원의 장례문제를 관장할 새 조직과 재정이 따로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5년 7월경에 국민회 내에 호상부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한인상조회의 회원들이 국민회 호상부로 옮겨가고, 상조회 운영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자구책으로 1939년 1월에 한인상조회를 한인기독교회에 부속시키고, 동시에 양로원 집들을 교회에 이전하였다.
그때부터 약 10년간 손노듸가 원장 (당시는 “홈장”이라 불렀음)으로 수고했고, 1948년애 김(박)맹조가 홈장이 되었다. (1968년 4월에 부임한 차승현 때부터 “원장”이라 불렀다.)
1951년에 이르러 양로원 낡아진 집들의 위생설비는 불완전하였다.
수리비가 많이 들것으로 판정이 나자, 1951년 8월 26일에 한인기독교회 평신도회에서 양로원 노인들을 한인기독학원에 남아있는 (학교는 1947년 폐교, 건물 부지는 1950년에 팔았음) 여학생 기숙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1953년8월에 노스 스트리트 집을 2만달러에 팔고, 1만 2천 달러는 교회 건물 수리비로 쓰고, 남은 8천 달러는 새 양로원 시설을 위해 저축하였다.
1955년에 노인들이 기거하고 있던 한인기독학원 기숙사 자리를 하와이 정부가 칼리히터넬로 가는 리케리케 하이웨이를 확장하기 위해 매입했다.
11월 15일까지 철수해야 했던 20명 노인들은 동지회 회관 (931 노스 킹 스트리트)으로 이사하여 살게되었다.
한편, 교회는 1927년 3월에 구입하여 교회 소속 신흥국어학교와 임시교회로 사용하였던 땅 (현 525 Kiapu Place)에 새 양로원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1938년에 광화문 문루를 가미한 교회를 설계한 김찬제에게 양로원 설계도 맡겼다.
본관 (행정관) 과 4채의 “2 가옥 아파트멘트”( 당시 용어, duplex) 건설비는 약 8만 달러였다. 1956년 2월에 건축을 시작하여 8월초에 완공하였다.
동지회 회관에 머물고 있던 20명 노인들이 8월 17일에 새 집으로 이사 들어왔고, 이틀 후 8월 19일 주일 예배 후 2시에 “건물 전시” (당시 용어, open house)를 하였다.
한인양로원은 1972년부터 한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개방되었다. 정부 보조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한 민족에게 국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74년 1월 1일부터는 Korean Old Men’s Home 이라는 이름을 Korean Care Home 으로 바꾸고 여성 노인들도 기숙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인양로원은 31개 침상 허가를 갖고 있지만, 본관이 비좁고 설비가 열약하여 27명만 살 수 있다.
더구나 코비드 상황에서 격리해야 할 환자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4개 침상은 비워두고 있다.
현재 23명이 살고 있는데, 연령은 82세에서 100세이며, 남녀 비율은 3:7이다.
한국계와 비한국계 입주자의 비율도 3:7이며, 이들은 차지한 방의 크기와 필요한 도움의 정도에 따라 매달 최저 3,300 부터 최고 6,000달러를 내고 있다.
그동안 한인사회가 양로원에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어 왔는데, 특히 2001년에는 독지가 프랭크 한 부부가 낡은 시설 개조를 위해 10만 달러를 희사하였고, 2003년에는 난 건축회사 패트릭 신 대표가 50만 달러를 희사하였다.
2003년 9월에 집 한채를 개조한 후 점차적으로 낡은 집들을 현 건축법에 맞도록 개조하고 있다.
1998년 4월에 부임한 윤삼실 원장과 여러 직원들의 수고에 고마움을 전한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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